진밭평화교당의 2천일에 즈음하여 ‘새우잠을 자도 고래 꿈을 꾼다’는 말이 있듯이 2평 남짓한 아스팔트 위의 초라한 천막 교당일지라도 원불교의 평화사상,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 동북아의 평화가 피어날 곳이라 확신한다.
나는 원기101년 9월 30일 서울 국방부 앞에 있었다. 7월 13일 발표된 성주성산포대의 사드기지가 제3의 부지로 초전면 소성리 롯데골프장으로 옮겨진다는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발표를 듣고 대구로 오는 동안 참 많이 울었다. 그때 결심했다. 당시 대구경북교구장이었던 김도심 교무님과 뜻을 같이한 몇 분의 재가교도와 논의 끝에 성주성지 수호 대구경북교구 재가비상대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성주성지 수호에 함께 할 것을 결의하였다. 교구장님께 “재가들은 무슨 일을 할까요”라고 말씀드리니 “지금 성주에는 교무님들이 많이 계시니 성지로 가지 말고 대구시내에서 성주 소성리에 원불교 성지가 있다는 홍보와 사드의 부당성에 대한 시민 서명운동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몇몇 분들의 격려 속에 성도현 교도님과 그해 10월부터 동성로 대백 앞에서 ‘원불교는 평화입니다’라는 피켓과 ‘사드는 미궁의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하나’라는 사실을 홍보하고 서명운동을 하였다. 그때 뜻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듣기도 하고 교도 가운데에도 거리로 나서는 자체가 잘못이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반미운동을 해본 적도 없었고, 평화주의자도 아니었다. 단지 우리 성지를 우리가 지킨다는 마음에서 오직 <정전> 제3수행편 12장 솔성요론의 ‘정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죽기로써 할 것이요’만 생각했다.
그러던 중 다음해 2월 27일에 롯데골프장이 임시배치 장소로 확정 발표가 되어 140여일의 동성로 캠페인은 마무리하고 청소라도 하겠다는 심정으로 진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때 진밭교에는 전국에서 오신 교무님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어떤 날은 300여분이 오신 날도 있었고, 천여분이 다녀가기도 했다. 그 후 몇 차례 국방부의 동의하에 수십명의 재가출가 교도가 구도길을 걷기도 했다. 그런데 3월 11일 국방부에서 구도길 탐방을 불허했다. 그러자 진밭교에서 교무님들이 구도길을 열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겠다며 연좌기도에 들어갔다. 시간이 흘러 새벽이 되자 마을 어머니들과 연대자들이 비닐로 교무님들을 덮어 주고 함께 앉아서 기도한 것이 지금의 진밭평화교당이 세워진 자리이다. 4월 26일 새벽에 사드 발사대 2기와 X밴드레이더 장비가 평화시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경찰의 도움을 받아 롯데골프장으로 들어갔다. 9월 7일 발사대 2기가 추가로 들어갔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이어졌다.
참으로 주마등 같이 지나간 시간들이었다. 선풍기 하나에 열기가 가득한 천막 교당과 컨테이너에서의 여름나기, 머리맡의 생수병이 어는 추운 겨울나기, 화장실도 없는 진밭 3년여의 생활, 그런 가운데서도 소소하게 행복했던 순간들이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
탄생가 사랑채에서 한동안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아침 일찍 정산종사님과 주산종사님의 진영이 모셔진 큰방에 문안 인사를 드리면 죽장을 짚으신 어른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는 날도 있고 무언가 꾸짖는 듯 한 언짢은 모습을 하시는 날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이 모두가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시간들이었다. 얼마 전 탄생가 앞 매점의 강 사장님이 “법선씨 그 많이 오시던 교무님들 다 어디 가셨는교?”라며 물었다. 요즘 진밭에서 교무님들 뵙기가 어렵다.
지난해 5월부터 지금까지 경찰의 지원으로 물품을 기지로 운반하는 차량을 저지하기 위해 대치한지 160여 차례이다. 7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숨 가쁘게 돌아가는 상황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미약하나마 ‘사드가고 평화 오는 그날’까지 평화의 성지 소성리에서 진밭 지킴이로 함께할 것을 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