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문화재 성적지 제 15호 : 창신동 터
교단 상장예법 최초로 실행
교단의 초기 예회의 기록 확인 가능
서울교구의 원불교 서울교당 창신동 터는 대지면적 165.3m2로 서울 종로구 창신길 144-2(창신동 605)에 위치하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원기 9년 3월 30일 최도화의 안내로 송규, 서중안, 전음광을 대동하고 처음 경성(서울)에 상경하셔 최도화의 안내로 쌍둥이자매 박사시화와 박공명선을 만나고, 박공명선의 딸 성성원의 집에서 삼사일 유숙한 뒤, 서중안의 주선으로 당주동에 1개월 한정으로 20여간의 가옥을 빌려 경성임시출장소로 정하였다.
그 해 10월 2차 상경하여 이동진화의 수양채에 머물면서 이공주, 민자연화(어머니), 이성각(언니)을 만나게 되고, 이 자리에서 소태산 대종사는 이 공주(共珠)라는 법명을 주셨다.
원기 11년 7월에 경성회원 10여 명이 모여 경성출장소 설립을 발기하였고, 이동진화는 자신이 수양채로 사용하고 있는 시가 1,000여원의 창신동 605번지 목조 초가 5간 1동과 4간 1동을 대지와 함께 희사하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20세의 청년 송도성을 경성출장소 교무로 파견했다. 경성출장소는 영광지부, 익산본관에 이어 세 번째로 교화장소를 마련하고 교무가 파견되어 교화가 시작된 것이다.
원기 12년 1월에 소태산 대종사가 상경하여 재가 선법과 고락의 원인에 대한 법설을 하였으며, 이공주와 성성원에게 시구를 내려 주신 후에 이는 성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대종경 천도품 4장)
원기 13년 <월말통신>의 발행으로 예회록이 수록되기 시작하는데 그해 12월 <월말통신> 제10호에 경성출장소 예회록이 처음 소개되었다.
불법연구회 경성출장소는 새 회상 지방교화지로서 첫 번째 출장소라는 점과 한 나라의 수도에 출장소를 설치하였다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또한 교단의 상장예법을 최초로 실행하였고, 교단의 초기 예회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의 산실이다.
서울교당에서는 원기 101년 6월에 불법연구회 경성출장소 창신동 터를 매입하였고, 원기 102년 3월 30일에 봉안식을 거행하고 현재 서울교구에서 관리 중이다.
원불교문화재 성적지 제 16호 : 서울 교당 돈암동 터
서울 지역 최초의 신축교당
원기 18년 11월 3일 낙성식 성대히 거행
현재는 국가소유의 삼선공원이 들어서 있어
원불교 서울 교화의 모태가 되었던 자리
서울교구 원불교 서울교당 돈암동 터는 서울 성북구 삼선동 1가 288-1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서울 교화의 시작인 서울출장소 창신동 회관은 회원이 점점 늘어 이에 이공주는 자신의 사가인 계동집을 처분하여 돈암동 509, 510번지 토지 585평을 매입하게 된다.
원기 18년 교무로 이완철과 이동진화가 부임하여 그해 6월부터 건축을 시작했다. 오창건의 감독과 소태산 대종사의 두차례 상경에 따른 지도 감리를 통해 그 해 11월 3일에 낙성식을 하여 서울 최초의 신축교당이 세워졌다.
소태산 대종사 감역 당시 짐을 지고 경성역에 다녀오라는 소태산 대종사의 명을 어긴 이완철에 대한 법문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다.(대종경 교단품 11장)
돈암동 회관은 독립된 건물로 지은 최초의 법당으로 양식과 일식을 절충한 화양식 12칸 목조 기와집으로 법당에 300여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
경성지부의 일원상 봉안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원기 22년 <조광> 6월호에 ‘교주를 생불 삼은 불법연구회의 정체’란 글에서 경성지부 불단에 ‘일원상이라고 하여 큰 목판에 푸른빛으로 원형을 그리고 거기에 절을 한다.’라고 하였다.
현재 돈암동 터는 삼선공원이 들어서 있으며 공원 한편에 위치한 표석이 이곳이 옛 불법연구회 경성지부였던 것을 알린다.
원기 83년 서울교구가 세운 이 성적비에는 ‘원기18년(1933) 원불교에서 서울지역 최초로 신축교당을 설립하여 현 원불교 서울교화의 모태가 되었던 자리’라고 새겨져있다.
4월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