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거나 눈물을 비치는 경우가 잦아진다. 나이가 들어가며 눈물샘 꼭지도 헐거워졌나 보다. 아님 공감의 영역과 자비심이 확장된 거라 우겨볼까….
뉴스를 통해 갑작스런 사고나 전쟁 소식을 보다가 ‘만일 나에게 저런 일이 있어 소중한 인연과 헤어지게 된다거나 연락조차 안되고 안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이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눈시울이 뜨거워 지다가 혼자서 눈물을 찍어내기도 한다. 전쟁과 가난과 무지와 질병 없는 평화세상이 되기를 기원하는 기도가 다른 때 보다 간절해 진다.
감사하게도 아버지의 사랑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사랑해, 보고 싶어” 라는 말을 들은 기억은 별로 없다. 그 시절 대부분의 아버지들이 그랬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어느날 전화를 하셨다.
“내가 어째 요새는 느그들이 보고잡다 ~”
보고 싶다는 말 속에서 아버지의 사랑과 허전함이 함께 느껴졌었다. 그렇게 전화 통화를 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떠나실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어찌 그렇게 미리 마음을 전하셨을까.
나는 아버지에게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을 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 뒤늦게 가끔씩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헤어짐과 마지막은 늘 회한을 남긴다. 한 해가 간다 하니 또 이별에 대한 느낌과 비슷한 감성 버튼이 눌러진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안혜연 교무가, 눈시울이 뜨거워지려 하는 안혜연에게 말해주고 싶다.
생사해탈이라는 것은 죽음 앞에 초연한 것이라 생각했거든.
‘삶과 죽음은 오고가는 것일 뿐이고, 옷 바꿔 입는 것과 같다.’ 라며 걸림 없이 훌훌 떠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
그런데 떠나는 순간 뿐 아니라 생(生)의 순간 순간 마다 해탈해야 할 일이 참 많더라.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인연들, 순경과 역경,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내게 머물렀다 가는 모든 것에 자유로울 수 있는것도 생·사 해탈 공부라는 생각이 드는거야. 결국 깨달음을 얻어야 될 것 같은데,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는 어떡하나 싶어 슬퍼졌지. 그래서 난 그냥, 살아가는 순간 순간을 후회 없이 가꾸어 보려고…. ‘…것을, …걸…’ 하는 순간이 적어지면 마음도 걸림이 좀 적어질까 싶어서.
그런 유행어가 생각나네. “잘 돼야 될텐데.”
해야할 일도, 공부도 미루지 말자. 지금 바로.
고마움도 사랑도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도 망설이지 말자. 지금 바로.
대종사님이 밝혀 주신 삼학 공부도 지금 이 순간에 하자는 거쟎아. 과거도 그때 그 순간이 만들었고, 미래도 지금 이 순간이 만드는거잖아.
올해를 보내면서 매 순간을 후회 없이, 해탈의 심경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 보려고….
12월 6일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