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수도 프레토리아 북부 베르그 애비뉴 382번지. 이 곳이 1996년 아프리카의 첫 번째 원불교 교당이 생긴 곳이다. 3월 15일 아직은 헛헛하니 텅 빈 교당을 찾은 김혜심 교무와 황수진·김현길 교무, 그리고 퇴임에 맞춰 1년간의 봉사를 자청한 봉산 이종명 교무의 마음에는 막막함 속에서도 크고 분명한 힘이 새록새록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인들이 사는 인근의 주택과는 달리, 프레토리아 북쪽의 교당에는 수영장이나 정원 대신 텃밭이 딸려있었다. 이곳에 이웃집들을 둘러보고 조언도 청해들어 배추, 당근, 무, 상추, 토마토, 그리고 이 곳의 주식인 밀리밀을 만드는 옥수수를 키울 수 있었다. 하지만 쌀농사는 어림없으니 중국가게에서 호주수입쌀을 사다 먹었는데, 한 포를 다 먹었을까, 파라다이스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던 정세웅·김현덕 부부 교도가 쌀을 들고 왔다. 감사한 마음에 한 톨 흘리거나 버리지 않고 먹었는데 다시 쌀을 들고 오는 것이 아닌가. “한인민박을 하니 쌀을 많이 사요. 교무님들 드실 쌀은 저희가 좀 대드리고 싶은데?” 쑥스러운 듯이 꺼낸 부부의 말에 교무들은 코끝이 다 찡해져왔다. 낯설고 두려운 미지의 대륙, 허나 세상 어디를 가도 두텁게 이어진 법연과 인연. 이 부부는 프레토리아에 이어 1999년 요하네스버스 샌톤으로 이사한 요하네스버그교당에까지 교무들의 배를 따뜻한 정과 인심으로 채워준 정세웅·김현덕 부부. 그들은 2009년까지 15년동안 아프리카 교화에 있어 근원적이며 가장 든든한 쌀 지원을 해주었다.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 어려운 점은 또 있었다. 평지지만 해발 1천 8백미터에 달하는 특이한 지형 덕분에, 밥 짓기가 버릇처럼 마음처럼 되질 않는 것. 그렇게 높은 곳에 그토록 넓은 평지라니, 교무들은 언뜻 평평하고 낮은 우리네 지형과는 다른 환경에 때때로 깜짝 놀라야했다. 결국 교도들의 조언대로 전기압력밥솥을 사용해야 고루 익은 찰진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이래저래 쉽지 않은 아프리카 첫 교당 생활이었다.
휘발유와 경유가 같은 값이라는 것도 신기했는데, 1996년 당시는 우리나라 기름값의 3분의 1 정도였다. 부유한 백인들의 삶과 곤궁한 흑인들의 삶이 극명히 대비되는 남아공은 대중교통이 거의 없는 데 반해, 국도며 고속도로가 잘 닦여있어 백인과 교민들 전부가 자가용으로 움직인다. 풍부한 지하자원을 수송하느라 유럽 강대국들이 건설한 도로의 수준은 독일 다음으로 꼽히는데, 제한속도가 시내는 120Km/h, 고속도로가 150~180Km/h이라 모든 차들이 쌩쌩 달렸다.
하루하루 교당이 자리잡아가며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자동차라는데 교무들의 의견이 일치했다. ‘한국차를 구하자’는 큰 결심으로 알아본 남아공 현지 관세는 무려 100%. 한국에선 천만원짜리 차가 남아공에선 이천만원인 셈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교당 생활이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전시회에 놓여있던 한국차를 싸게 들여올 수 있는 기회를 잡은 프레토리아 교당, 그렇게 가지게 된 아프리카 첫 자동차는 당시 대우가 내놓았던 에스페로였고, 전시회장에서 넘겨받은 에스페로가 교당에 오던 날, 교무들은 ‘이제야 우리 발이 생겼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교무님, 여기 명단엔 한국 전쟁 희생자도 있네요!!!”
교도들과 프레토리아 대통령궁 앞 유니온 빌딩에 처음 갔던 어느 날, 참전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단에서 ‘Korean War’를 발견한 한 교도가 이렇게 외쳤다. 40여년 전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파견된 남아공 공군지원병력 중 36명이 사망하고 2명이 실종돼 이 명단에 이름이 올려진 것이었다. ‘아, 여기서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바로 우리를 도운 이들의 명복을 비는 일이구나’서둘러 위령제 준비에 들어간 김 교무는 은혜라는 것이 단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 본래 주고 받으며 일원상처럼 둥글게 돌아가는 것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민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