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길 법문] 둘이 아닌 내정정內定靜 외정정外定靜

지름길 법문 18

2022-06-23     라도현
라도현<br>화정교당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무릇, 사람에게는 항상 동(動)과 정(靜) 두 때가 있고 정정(定靜)을 얻는 법도 외정정과 내정정의 두 가지 길이 있나니, 외정정(外定靜)은 동하는 경계를 당할 때에 반드시 대의(大義)를 세우고 취사를 먼저 하여 망녕되고 번거한 일을 짓지 아니하는 것으로 정신을 요란하게 하는 마(魔)의 근원을 없이하는 것이요, 내정정(內定靜)은 일이 없을 때에 염불과 좌선도 하며 기타 무슨 방법으로든지 일어나는 번뇌를 잠재우는 것으로 온전한 근본 정신을 양성하는 것이니, 외정정은 내정정의 근본이 되고 내정정은 외정정의 근본이 되어, 내와 외를 아울러 진행하여야만 참다운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되리라.」 (<대종경> 수행품 19장)

소태산 대종사께서 제자 이순순에게 재가공부(在家工夫)를 어떻게 하는지 물으신 뒤에 해주셨던 법문입니다. 여기서, 마음을 안정하는 데에 있어서 밖으로 동하지 않는 공부가 외정정이며, 안으로 번뇌를 가라앉히는 공부가 내정정입니다. 그리고 이 두 공부는 서로가 근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즉, 외정정과 내정정이 서로 각각이 아니라는 것으로, 바로 여기에 공부의 핵심이 있습니다.

외정정(外定靜)은, 동하는 경계에서 대의(大義)를 세워 망녕되고 번거한 일을 짓지 아니하여, 정신을 요란하게 하는 마(魔)의 근원을 없이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동하는 경계에서 대의를 세워 취사를 한다는 것은, 일에 있어 시비선악을 분명히 알아서 바르게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허황하거나 어지럽지 않으며, 욕심에 끌리어 집착하지 않으므로 정신이 스스로 평안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마(魔)의 근원을 없이한다’고 하였습니다.

내정정(內定靜)은, 일이 없을 때에 염불과 좌선 등으로 마음의 번뇌를 쉬어서 우리의 온전한 근본 정신을 기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텅 비고 고요하게 지킴으로써 분별 주착이 없는 성품의 본래자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정전 일상수행의 요법에 있는 것처럼 ‘원래 요란함과 어리석음과 그름이 없는’ 심지를 되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안팎으로 하는 외정정 내정정이 실은 두 가지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마음이라고 할 때, 이 ‘마음’은 분명 내 안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모든 지각(知覺)과 그로 인해 파생되는 것들을 보면, 안팎으로 일어나는 것들이 실상은 이 ‘마음’을 떠나서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나’와 ‘나 아닌 것들’ 뿐만 아니라, 일체 모든 것의 유무 시비 선악 등이 오직 ‘마음’이 아니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있어 일체 경계가 있고, 마음이 나서 그에 따라 행위가 일어나니, 안과 밖이 실은 둘이 아니어서, 안팎으로 하는 공부가 서로 둘이 아닙니다. 실제 안으로 한 마음이 모든 망상 분별을 떠나 청정하면, 밖으로 일체의 행위가 스스로 상(相) 없는 공적영지의 작용을 나투니, 이 때가 참다운 외정정 내정정의 모습입니다.

위 법문에서 ‘동(動)과 정(靜)’을 구분해서 말씀하시고, ‘대의(大義)’를 세우며, ‘마(魔)의 근원을 없이한다’는 등의 말씀은 대기설법(對機說法)으로써, 이 모든 공부는 이미 우리 자성의 공적원명(空寂圓明)한 작용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때문에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외정정은 내정정의 근본이 되고, 내정정은 외정정의 근본이 된다”고 하시고, “내외를 아울러 진행하여야 참다운 마음의 안정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온전한 공부는 안팎이 둘 아닌 것으로써, 바로 이것이 동정일여(動靜一如)의 무시선입니다.

6월 2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