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다

1 나우와 함께하는 마인드 스터디 42

2011-12-28     한울안신문

일본의 하라 단잔(原 坦山: 1819~1892)선사가 젊은 시절 도반인 구가 간케이 스님과 행각(行脚)을 다니던 때였다.


비가 오다가 갠 어느 날 두 사람이 작은 냇가에 이르렀다. 그때 한 아리따운 처녀가 불어난 물 때문에 시내를 건너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았다. 단잔은 주저없이 그 처녀에게 다가가 “내가 건네 드리죠.” 하고는 그녀를 번쩍 들어서 맞은편으로 건네주었다. 처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총총히 사라졌다.


두 스님은 길을 재촉해서 저녁 무렵 어느 여관에 들었다. 저녁상이 나오고 둘이 마주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간케이가 작심한 듯 말을 꺼냈다.


“자네, 출가 수도승이라는 자가 젊은 처자를 품에 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러자 단잔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는 아직도 그 처자를 안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그때 거기에 내려주고 왔는데.”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건마는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그 그름을 없게 하는 것으로써 자성의 계(戒)를 세우자.」


일상수행의 요법 제3조입니다. 심지는 ‘원래 그름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육조 혜능스님은 이를 ‘심지무비자성계(心地無非自性戒)’라 하였습니다. 심지가 그름이 없는 까닭은 본디 요란함과 어리석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바탕은 텅 비고 고요한 것이기에 애초부터 요란함이 없으며, 그래서 지극히 밝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또한 저절로 바른[正]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성의 계’라고 합니다.


그런데 앞서 두 조목과 마찬가지로, 원래 그름이 없는 심지에 ‘경계를 따라’ 그름이 생기는 것은 ‘경계에 끌려’ 주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경계에 주착하면 자성의 정(定)이 무너지고, 정이 안 되니 혜(慧)도 뜨지 않으며, 그에 따라 자성의 계(戒)도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자성의 계’란 분별심으로 시비와 선악을 가려서 지키는 계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흡사 ‘철든 사람’이 ‘철든 행동’을 하듯이, 마음이 텅 비고[空] 밝은 때에[圓] 행동(육근작용)이 저절로 바르게[正] 되어지는 것을 일컬어 ‘자성의 계를 지킨다’고 합니다.


위에 소개한 선사의 이야기는 우리가 지닌 자성(自性)의 작용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라 단잔 스님이, 텅 빈 마음으로[定] 곤경에 빠진 처녀(경계)를 대하자, 마음에 두렷한 지혜가 솟아서[慧], 저절로 돕는 행위를 하게 된 것[戒]입니다. 바로 성품의 공원정(空圓正)입니다. 그런데 도반스님은 경계(처녀)에 주착하여 정(定)을 잃었고, 그래서 혜(慧)가 막혔으며, 때문에 자성의 계(戒)도 무너졌습니다. 분별주착에 의해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생긴 것입니다.


때문에 정산종사께서는 「일심이 동하면 정의가 되고, 잡념이 동하면 불의가 되나니라」(경의편 30장)고 하셨고, 또한「천지와 나는 같은 한 몸이라, 나와 천지는 같은 마음으로 바르다 天地與我同一體 我與天地同心正」(靈呪)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생활에서 자성삼학이 나타나고 무너지는 예를 들어보면,


우연히 길 위에 돈이나 귀중품이 떨어져 있으면, 텅 빈 마음에서는[空] 저절로 혜가 나서[圓]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려고[正] 합니다. 그러나 그 물건(경계)에 마음이 끌리면(주착), 심지가 요란해지고[亂] 어리석어져[癡] 그릇된 행동[非]을 저지르게 됩니다.


누군가가 충고를 해오면, 빈 마음에서는[空] 저절로 혜가 나서[圓] 자기를 반성합니다[正]. 그러나 충고하는 이에게 상(相)을 내면(주착), 심지가 요란해지고[亂] 어리석어져[癡] 도리어 화를 내고 원망하게[非] 됩니다.


누군가가 잘 되는 것을 보면, 빈 마음에서는[空] 저절로 지혜와 자비가 나서[圓] 함께 기뻐합니다[正]. 그러나 그가 얻은 것에 마음이 끌리면(주착), 심지가 요란해지고[亂] 어리석어져[癡]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게[非]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바탕은 본디 공원정(空圓正)이며, 이를 자성의 정혜계(定慧戒)라 하고, 이 공원정의 원리로써 자성삼학을 닦는[삼학병진] 수행을 무시선(無時禪)이라 하는 것입니다.


라도현(과천교당) now_sun@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