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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를 가장 잘 묘사하는 ‘일원상 서원문(둥근 진리 앞에서 내가 맹세한다는 뜻)’은 ‘진리는 가만히 마음을 가라앉히면 만나게 되는데, 말의 길이 끊어진 자리이다’라는 구절로 시작된다. 그리고 원불교가 내 건 인류의 메시지인 정신개벽이 이러한 ‘말이 끊어진 어떤 자리’에 닿아야만 얻을 수 있는 무엇인 것 같다.
서양의 문명을 결정한 기독교에서는 ‘말씀’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독교의 4대 복음서 중 가장 뒤에 지어졌다고 생각되는 요한복음에서는 첫머리에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이 육화되었다고 쓰여 있다. 무슨 말인지 애매한 점은 있으나, 성경이라는 말을 통해서만 진리의 말씀이 전해지고 또한 물질로 나타난다는 그런 뜻이리라.
이에 비해서 동양에서는 말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노장사상의 영향이 클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 너무 말을 많이 하거나, 질문을 많이 하면 야단맞았다. 말을 통해서 질문하고 사고하는 서양에 비해서 이러한 전통 때문에 동양이 어두운 근대를 맞이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이에 비해 최근에는 SNS를 보면 말 천지이다. 한사람이 말하면 댓글로 달리고, 심지어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AI가 말을 배워서 오만 말을 다 한다. 비서일 뿐만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목소리나 감정도 실어낸다. 이러한 시대에 소태산 대종사라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정신개벽을 내세우는 원불교, 그리고 진리가 아무리 말이 끊어진 자리라고 할지라도, 말로 표현해야만 한다고 가르친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을 화두로 걸어본다.
인류가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는데 수십 만 년이 걸렸다. 개나 고양이가 수십 만 년 후에 말을 할 것 같지 않다. 이러한 능력을 어린아이는 몇 년 동안에 다 체득한다. 수십 만 년의 노력을 유전형질을 통해서 이어받아 몇 년 만에 해내는 것을 보면 신비롭기까지 하다. 아무나 하는 말, ‘말만 잘 한다’ 하고 경시하는 말에는 실제로는 단순히 서로 뜻을 전하는 도구를 넘어서 놀라운 기능이 내포되어 있다. 이 말에 의해서 지능도 생기고 또 ‘나’라는 느낌도 생기는 것이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특징, 즉 감정, 판단, 고도의 기억 그리고 인과율, 도덕율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 ‘뇌과학’이 과거 80년 분자 생물학의 도움을 받아 급격히 발전했다. 특히 뇌의 활동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전기적 파형, 그리고 MRI 사진을 통해서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뇌의 부문별 기능과 서로의 연결이 분자 수준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 중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안·이·비·설·신’의 신경이 모이는 뇌의 그윽한 곳, 특히 시상하부, 그리고 해마 부분(우리 눈·귀의 바로 뒤에 있는 곳)이 미치는 중요성이다. 이곳은 과거 기억을 떠올려서 현재 들어오는 감각을 합해서 ‘의’를 만드는 곳이다.
그리고 ‘말’을 통해서 ‘나’라는 인간만이 가지는 개념을 만드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마음대로 잘되지 않는 생각, 느낌, 증오와 사랑에 비해서 ‘말’만이 우리가 마음대로 조작하고 순서도 정할 수 있다. 잠잘 때는 말을 할 수 없고, 꿈에서도 말을 지어서 할 수 없다.
깨어있을 때, 우리는 ‘말’을 통해서 문화도 만들고, 도덕도 만들고, 인과율도 만들고, 자연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이해의 틀을 만들게 된다.
이제 원불교에서는 이 말이 끊어진 곳을 알라고 채근한다. 여기에 정신개벽의 ‘정안(바른 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터부시하고, 심지어 말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노장사상’ 그리고 선불교에 비해서 원불교 가르침은 말이 끊어진 곳, 생각이전을 알라고 하지만(주로 선을 통해서), 말을 통해서만 이 진리의 자리를 나타낼 수 있다고 가르친다(<대종경> 성리품 24~25장). 이 세상 어느 가르침도 이러한 놀라운 틀을 제시한 곳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바이올린을 통해서만 놀라운 악보들이 표현되지만, 바이올린에는 어떠한 음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나무통과 4개의 금속 줄이 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그윽한 뇌’를 통해서 말, 생각, 나라는 느낌이 나타나지만, 뇌에는 어떠한 ‘진리, 참나, 일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과 생각을 통해서만 말이 끊어진 곳, 생각이전을 알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개벽을 이루는 원불교적 접근법이 될 것이다. 아무리 큰 업적을 이룩한 뇌과학자, 심리학자, 철학자, 예술가, 스포츠, 사업가라 하더라도 번뇌에 시달리고, 뿌리가 없는 삶을 산다는 느낌을 가진다.
뇌과학, AI가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고 흉내 낼 수 있다고까지 큰소리치는 현대에 ‘정신개벽’만이 인간에게 올바른 삶의 빛을 준다는 원불교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새겨볼 때이다.
3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