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에서 깨달음이나, 의두·성리에 대해 질문하면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무시선·무처선(선을 하는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뜻)을 교리의 중심에 두면서도 불교의 선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면 무언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든다. 담박 깨침보다 단계별로 진리에 다가가는 것을 중요시하고 ‘다른 종교의 교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중요시(출가위 조건)하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 불교의 정통이라고 할 수 있는 간화선과 ‘의심’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선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지운다. △생각 이전, 혹은 생각의 끝에서 깨달음의 빛 같은 것을 발견한다. △깨달음을 성취하려면 바보(석두) 같이 꾸준히 해야 한다.
깨달음에서는 ‘형상이나 생각의 틀’을 싫어한다. 아하, 이런 것이 깨달음이겠지 하고 ‘생각으로 틀을 만드는 순간’ 깨달음은 달아나버린다. 생각을 지우는 방법으로 ‘화두’라는 엉뚱하게 들리는 질문을 받는다. ‘나는 누구인가? 부처는 똥 막대기, 개에는 불성이 없다’ 등 많은 화두가 있고, 원불교에도 20개의 의두요목이 있다. 어렵게 느껴지는 이 길을 가는 방법으로 ‘의심’이 생기게 하는 법을 제시한다. 의심은 쩔쩔매는 상태이다. 생각으로 답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황당하다. 분해서 잠도 오지 않고 오직 의심 하나에만 매달린다. 선 스승은 제자를 의심에 걸리게 하는데 도사들이다. 그 의심은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이르게 한 의심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저, 의문만이 덩그러니 남은 상태(의심이 뭉쳐져서 이슬과 같이 맺힌다고 한다; 의단이 독로)에서 갑자기 빛이 찾아온다.
땅이 꺼져버리고 하늘 땅이 거꾸로 되고, 나와 남이 없어져 버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 변산 굽이굽이 흐르는 물소리를 내가 듣는지 서 있는 바위가 듣는지 확실하지 않다. 철학으로는 닿을 수 없는 어떤 경지가 찾아온다는 스승의 경험을 믿고 따른다(원불교 신·분·의·성의 신이다).
뇌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비적인 체험에 대한 과학적 이유가 밝혀지고 있다.
뇌를 다친 사람의 뇌를 수술하거나, 임사체험 시 산소가 떨어지게 되어 뇌가 동작하지 않는 순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는 보고가 많이 나와 있다. 뇌를 조작해서 희열을 줄 수는 있더라도, 깨달음을 줄 수도 알아낼 수도 없다. 희열(혹은 법열 같은 것)은 깨달음의 전조 같은 것이기는 하지만 깨달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불교에서는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서 닿게 되는 깨달음을 ‘일원’의 자리라고 가르친다. 일원은 ‘생사’의 원리이고 인과를 주재하는 적극적인 주재자이다. 일원은 실생활에서 수많은 인연을 만날 때 일어나는 ‘나의 생각’ 이전을 들여다보면 항상 만나게 되는 은혜 같은 것이다. 원불교는 실생활에 널려있는 일들을 모두 깨달음의 레시피로 만드는 적극적인 가르침이다. 과학이 뇌까지 파고들어서 심지어 깨달음의 인과까지 밝히려는 시대에 이러한 물질 과학을 품으면서도, 정신을 개벽하는 유일한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다.
[원불교에서 깨달음이나, 의두·성리에 대해 질문하면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선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지운다. △생각 이전, 혹은 생각의 끝에서 깨달음의 빛 같은 것을 발견한다.]
[의문만이 덩그러니 남은 상태(의심이 뭉쳐져서 이슬과 같이 맺힌다고 한다; 의단이 독로)에서 갑자기 빛이 찾아온다.]
수행자로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공부와 토론 牧牛會 (9월30일 14:00 • 격주로 개최)
Zoom 428 428 2020 에 다시 참여해 보시기 바랍니다.
체험 없이 論斷하는 것은 구도자의 싹을 없앨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줄에서 시작해서 왼쪽으로 갑니다.
그래서 다 쓴 뒤에는 낙관을 맨 왼쪽 줄 아래에 찍게 됩니다.
그런데 좌에서 우로 한글을 써간다면
낙관을 찍는 위치는 맨 우측 아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붓글씨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독창적으로 가려면
낙관의 위치 때문에 한글을 거꾸로 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