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다!!"
삼월초, 아이고모부가 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받고 고향 김제에 들러 시댁 어른을 모시고 고창으로 향했다. 아직 60세도 안되신 고모부는 혼자 고향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일년에 두어번 안부전화를 꼭 하셨었는데, 급하게 가셨구나! 무심히 빈 들을 지나치는데 분명 파랗게 보이는게 보리였다. 청년인 아들에게 ‘저것이 보리다’고 말할 겨를이 없이 큰 소리로 “보리다!”하고 외쳤더니 앞좌석에 숙부님이 놀라 “응?” 하셨다. “얘는 보리를 모르잖아요. 가르쳐 주려고요.”
고창 장례식장에 들러 문상을 하고 밤에 집으로 왔는데 보리에 대한 추억이 자꾸 떠올랐다.
아버지 어머니와 셋이서 보리농사를 지을 땐, 아버지께서 이랑에 흙을 떠놓으시면 어머니하고 한 두렁씩 맡아 괭이로 흙을 퍽퍽 깨 보리 뿌리에 넣어주었다. 보리가 자라면서 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어머니께서 괭이 잡고 쉬시며 아픈 허리에 손을 얻으시면 그 마음이 전해져 와, 한쪽만 괭이질을 하던 나는 속도를 높여 어머니를 앞질러 갔다. 그럴때면 아버지께선 “우리 경순이가 머리쓰는게 지 어미보다 낫다”고 웃으셨다.
신김치에 물린 봄이면 동무들이랑 보리밭에서 나는 깨끗한 나물도 캐고, 자운영을 한 소쿠리 캐서 상큼한 나물해서 쑥국과 함께 드리면 아버지께서 참 좋아 하셨다.
그리고 밀, 보리가 익어가면 어머니는 보리 한 줌 뽑아 살짝 익혀서 껍질은 ‘후~’ 불어 보낸 뒤 내 손바닥에 놓아주셨다. 그 때의 어머니의 정이 몹시도 그리운건 아마 내가 노년에 접어들어서 일까.
이 소박한 풍경들은 내 추억의 장으로, 각박한 이 도시 생활 중에서 나에게 행복을 준다.
그전엔 이모작으로 농가마다 보리 농사를 지었다. 다수확품종 쌀농사에 밀려 힘든 보리 경작은 소농에 그쳐 가지만 보리밥에 된장국은 우리에게 영원한 향수로 남을 것이다.
저작권자 © 한울안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