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묵묵하다. 특유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남들보다 두 세배는 더 뛰지만, 언제나 소리 없이 행한다. 여기저기서 받은 봉사상도, 남들이 말하기 전에는 그에게 있는지도 모르는 상이다. 그런 묵묵함이 더 화려한 빛을 발하는 장충은 교도가, 이번엔 2009자원봉사자 축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여전히 쑥스럽고, 부담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 소리없는 봉사
봉사수첩을 뒤적거려 봉사 시작 연도를 찾는 장 교도. 빨간 도장의 발자국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보니 98년 10월에 멈춰있다. 벌써 만 10년간 한 곳에서 봉사해 온 것이다.
“남편도 상 받는다고 하니까, 맨 처음 하는 말이 ‘그래, 오래했네’였어요.”
정확히 1시간 40분이 소요되는 등촌복지관을 매주 월요일마다 만원버스에 시달리며 10년간 어르신들을 만난 그의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할머니들과 정도 들었고, 일손이 부족하다 하니 안 나갈 수가 있나요.”
‘그냥 좋다, 그저 좋으니까’라며 간단히 답하는 장 교도지만, 그가 받은 상의 종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복지관과 구청에서 받은 상만 수두룩, 그의 묵묵함을 사회에서 먼저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대단하세요’에 돌아 온 답은 “상 받는 것보다 음식을 만드시는 주무님이 ‘월요일이 제일 손발이 척척 잘 맞는다’며 좋아하시는 게 더 기쁘다”는 장 교도의 묵묵한 답. 10년 이상을 함께 해온 굳건한 4인조 팀이 없었다면, 150분의 식사준비를 위해 씻고 다듬고 무치고 하는 일은 여전히 겁나는 일이었을 거라며 공을 돌린다.
“얼마 전 몸이 안 좋아 하루 빠졌더니 제 얼굴도 모를 것 같던 할머니들이 ‘왜 안 나왔냐, 걱정했다’며 손잡아 주셨어요.”
그걸 보며 봉사가 보답 없는 것만이 아니란 걸 알았다는 그, ‘그런 봉사가 재미 아닐까’라며 살포시 웃는다.
# 좋은 데 가셨지요
그의 봉사 시작은 시어머니의 열반과 같이 한다. 정성껏 모셨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허전한 마음을 메울 수 없어 복지관 봉사를 시작한 것이다.
“동네에서는 호랑이 할머니로 소문났었지만, 저에게는 어디든 같이 하는 한 몸 같은 분이었어요.”
구청장 효부상을 받을 만큼 소문난 효부였지만, 돌아가신 후에는 잘한 것보다 못한 것만 생각났다는 그가 복지관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얼마나 정성을 다 했을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어머니를 잘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이 강했지요. 그래서 더, 어머니 반찬 만들듯이, 어머니 밥 짓듯이 봉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봉사를 시작하고, 어머니가 장 교도의 꿈에 찾아왔다. 바위에서 깨끗한 물이 흐르고 꽃이 흐드러지게 핀 곳에, 단아한 옷을 입은 어머니가 ‘잘 있어라. 수고했다’며 인사했다. 그 후 한번도 그녀의 꿈에 오신 적 없다는 어머니.
정 교도는 어쩌면 ‘어머니를 잘 보내드리고 싶은 생각’이 여기까지 오게 한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아 맞다! 남편도 빼 먹으면 안 되요. 남편도 월곡동 노인정에서 한글봉사를 하고 있는 저의 봉사 스승이니까요.”
남편의 자랑을 하고나서 그제서야 얼굴에 웃음이 번지는 그이다.
김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