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서 있기만 했다 / 흐느적이는 풀잎 틈새에서 / 함께 흔들릴 수 없는 자폐증 / 그 자포(自暴)의 중증을 앓고 있는 것일까 / 어디론지 몸 추슬러 발걸음 옮겨야 하리라는 압박감 / 그 강한 바람으로 온 몸을 흔들고 / 이젠 중심을 가누지 못하는 연약한 나무 / 그대여,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으면 / 한번도 내게 다가오지 않던 사랑의 언어로 / 포근히 감싸일 수 있을까 / 등골 속으로 엄습하는 시간들과 / 허울 좋은 분장을 하고 / 분장 자국마다 얼룩진 안개를 위해 /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의 / 작은 새 한 마리는 날려 보내고 싶다 / 그대여, 눈물마저 환각만 홀로 젖은 / 내 발부리에 휘휘 감긴다해도 / 눈 감은 채 풀벌레 울음소리나 듣겠다 / 내 몸에 맞는 색깔의 차림새로 / 그냥 서 있겠다 / 광활한 하늘이 열려 내 노래 소리만 들려준다면.
이 작품은 당시 다양한 고뇌의 일탈을 위해서 어디론가 잠적하고픈 심정이 넘실거리던 때 발행된 시집 ‘혼자 춤추는 이방인’에 수록된 ‘靜中動’ 세 연작에서 ‘靜’인데 그 고요함이 어떤 성찰과 기원의 의지로 나타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공(空)의 개념을 정(靜)이라고 할 수 있다. 선계(仙界)나 구도자들이 음미하고 실천할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의 자아 인식과 성찰에는 이러한 개념의 긍정적인 사유의 지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은 시 정신에서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유한(有限)의 인간들이 돌아갈 곳은 역시 무한(無限)의 시간으로의 회귀이다.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시의 나’를 찾는 일이다. ‘동처 정득래(動處 靜得來-움직이면서도 고요함을 얻는다)’란 옛말처럼 다양한 현실적 복잡성 가운데서 고요함의 경지를 얻는 혜안과 거기에서 분출되는 정적언어가 앞으로 나의 작품에서 전개될 ‘여백’의 화두로 전이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