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형부터 변하더라고요. 어디서든 일하기 편한 복장으로요. 하이힐도 그때부터 안 신었어요.”
의류사업을 하던 사장님답게 어디서든 눈에 띄는 멋쟁이였던 정은숙 교도가 트레이드마크였던 하이힐을 벗고 운동화를 고집하게 된 건 봉공, 정확히 말하면 봉공회의 가정파견 봉사활동이 아니면 가볼 일 없던 가파른 산비탈을 오른 후였다.
# 하이힐 신은 봉공?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이런 세상도 있구나, 많이 생각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복장이 달라지더군요.”
하이힐에서 내려오고 나니 더 많이 나눌 곳이 보였다는 정 교도, 바꿔 신은 운동화를 조여 매고 소년원, 재난현장, 복지관으로 뛰기 시작했다. 수재현장에서는 1000명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식당아줌마도 되었고, 교구봉공회임원으로 바자회 물품 간택(?)할 때는 눈 깐깐한 사업가도 되었다. 얼마 후에는 잘 나가던 사업도 접었다. 이유는 하고 싶은 걸 더 잘하기 위함, 그 한가지였다.
“파주수해현장에서 매일 천명분의 뜨거운 밥을 하던 기억, 더운 여름날 할머니들을 만나기 위해 산비탈을 오르던 땀방울, 바자회 삼총사로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추억. 드디어 군용텐트를 버리고, 서울교구 봉공회 이름이 적힌 분홍 텐트를 회관 마당 한가득 깔던 희열. 기억의 어느 단면을 들여다 보아도 봉공의 기억들이 남아있어요.”
여행지에서도 ‘여기는 그 때 봉공장소’, ‘여기는 바자회 새우젓, 굴젓’으로 기억이 자연스레 흐를 정도. 하지만 그 겹겹이 쌓인 기억 어디에서도 상은 한 톨도 남아있지 않다.
“베푼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제가 즐거웠으니까요, 무거운 걸 이고지고 다녀도, 힘들지 않았거든요. 힘들었다면, 잊고 싶었겠지요. 그러니 내가 더 감사해야지요.”
아마 인생을 이등분으로 나눈다면 봉공 이전과 후로 나뉠 거라는 정 교도. 뾰족구두와 운동화라는 그 경계선을 넘게 해준 봉공이 진정한 신앙을 만나게 해준 은혜라 말한다.
# 얼굴없는 후원자
둥글게 앉아 돌아가면서 교전봉독하던게 첫 기억일 정도로 신심 두둑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 교도. 좋은 음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교무님 먼저,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정갈하게 옷 갈아입고 기도하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그녀였다.
“주무, 단장도 그런 영향이었어요. 살아있는 신앙의 표본을 보고 자랐으니 다른 곳으로 흐를 수가 없었지요.”
개봉과 시화·태백교당 봉축 희사로 부부가 같이 받은 상만 해도 종법사, 교정원장, 교구장 등 5개, 은자녀를 맺어 후원한 교무님도 수두룩. 하지만 했다는 상이 남을까 두려워 지금도 얼굴 없는 후원자로 남아있다.
“후회스러운 것 많지요. 방방 뛰어다니기만 했지, 교전공부를 많이 못한 거, 기도 부족했던 거. 봉공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그건 핑계지요. 그때는 내가 이렇게 부족하구나 생각을 못했을까요?”
어머니 같은 인자한 모습으로 남고 싶다는 그녀, 그러기 위해 일생을 품은 일원상, 놓을 일 없을 것이란다.
김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