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사경(寫經)하고 합장기도와 봉사 수련을 쌓아 그 노력·선행에 대한 확인과 격려의 표시로 법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가족으로서도 반갑고 경하할 일인 동시에 남편인 저로서는 뭔가 반성의 기회를 맞는 느낌입니다.
착하고 예쁜 아내를 우연히 만나 70이 넘은 지금까지 40여년을 함께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는 아내로 인해 수많은 은혜로운 인연의 넝쿨이 쏟아지듯 주어졌습니다.
첫번째 큰 은혜는, 세상을 넓고 곱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은혜와 보은의 종교, 원불교’를 접하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서울로 유학을 오면서부터 연이은 가정교사 노릇에 찌들었던 나는 외세에 휘둘리는 사회에 끝없이 분노하고 데모하며 두들겨 맞고 구치소에 잡혀갔으며, 회사에 취직해서도 똑같은 사정으로 인한 분노와 악몽에서 헤매다보니, 사람들을 배려하거나 보은의 대상으로 생각할 착한 마음의 여유는 거의 사라져버렸지요. 물론 약자들을 가난의 궁지로 몰아가는 사회적 불의에 분노한 것도 농촌 고향의 조상님들과 이웃 친지들에게 빚진 은혜에 대한 보은의 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변명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두번째로 뚜렷하게 느낀 큰 은혜는, 원불교의 가르침이 기존의 여타 종교들에서처럼 가공적 절대신(사실은 소수의 인간들)의 일방적 명령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이 아니고, 인간세상의 깊은 이치와 인연관계를 인고의 성찰 끝에 몸소 깨달으신 지혜로운 스승님들의 말씀과 실천행위를 모범으로 삼아, 그것도 자기 나름의 시시비비를 가려가면서 따라 배우고 숭배하며 실천으로 엮어갈 수 있는 ‘사람의 종교’임을 알게 된 점입니다.
많이 어리석다고 생각되는 이 사람도 그 전통 깊은 외래 종교가 내세워 온 ‘만능 구세주’의 의미와 그가 강조한 것으로 선전되어 온 ‘절대명령의 내용과 이유와 목적’에 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속좁은 나의 생각으로는 신(神)에 대한 온갖 설명은, ‘자연법칙의 적절한 활용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우주와 세계의 무한한 변화발전을 작동시켜가는 자연법칙은 인간에게 무한정으로 유익한 혜택과 영향력을 제공해 주는 은혜로운 존재인 동시에, 한량없이 거대한 해독(재앙)을 끼치는 무서운 것이라는 존재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봉건시대나 자본주의·제국주의시대, 심지어는 무착취·평등민주를 강조하던 사회주의 사회에서 조차도 고통스러운 생산노동을 피하고 불로소득의 범죄적 혜택을 더많이 차지하려던 힘있는 자들은, 저 자연법칙의 유익과 해악을 자기네 입맛에 맞추어 해석하고 신(神)의 명성을 빌어(혹은 스스로들 신이 되어) 착한 약자들에게 대충 반복해서 읊어댐으로써 순종을 유도하고 지배질서의 유지·발전을 도모했던 것으로 추론되었습니다.
세번째 은혜는, 고된 노동에 의해 인간 생존의 필수자료인 의식주를 생산·공급해주는 노동자·농민·어민들의 피땀어린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보은의 자세를 가르쳐주었다는 점입니다. 불로소득을 바라던 힘있는 사람들은 근로계층 사람들이 힘든 노동과 궁핍에 시달리다 못해 평등·민주화하자며 반항이라도 하면 징그러운 독사라도 만난듯이 질겁을 하면서 ‘붉은 악마’로까지 을러대는 파렴치한 범죄자가 되어버리곤 하였지요. 이같은 인간들의 악습을 착한 상호 보은의 심성으로 바꾸어가려고 하는 것이 바로 원불교의 이상(理想)이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비로소 방향을 잡고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내의 법호 축하글을 쓴답시고 엉뚱한 길로 ‘거창하게’ 흘러간 것 같습니다. 처음엔 못난 나 때문에 아내에게 고생 많이 시켰다고 쓰려했는데…, 그러니까 아내의 법호의 의미는, 개인과 가족에게도 영광이고 보람이지만, 사회적으로도 평등민주화 노력의 길이 약자의 피땀어린 고통에 최소한으로라도 보답하는 올바른 보은의 길임을 확신케 해 준 ‘뜻깊은 격려사’로 받아들이면서 또 하나의 은혜로, 감사하는 바입니다.
※ 박지동 교수님은 압구정교당 정양자 교도님의 부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