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기도하는가-도법스님"실상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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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기도하는가-도법스님"실상사 주지
  • 한울안신문
  • 승인 2002.11.0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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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화포럼"10월22일"전북자연환경연수원


저는 오늘 여기 강제징용당해서 왔습니다. 안나오면 안된다고 해서요. 징용당해서 와서 무슨 할 얘기가 있겠습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점잖게 얘기하지도 점잖게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막되 먹게 얘기하는 편인데 그래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막 얘기하니까 또 말에 실수가 많고 거친 얘기도 많고 그렇습니다. 이런 점 사전에 구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원불교하고는 금산사가 제 친정입니다. 오래전부터 저의 남편입니다. 열반하신 대산종사님이 살아계실 때 밥도 얻어먹고, 금산사에 오시기도 하시고 원대에 계시는 한기도, 한경난, 양은용, 정순일 교수님 등 많이 만나고 했습니다. 원불교는 수련원을 훈련원이라고 하더군요. 군사용어도 아니고 말이죠. 최근 실상사 주변에 원불교에서 훈련원을 짓는다고 마을주민들과 첨예한 갈등이 있더군요. 그래서 옆에서 보다가 딱해서 제가 지역주민들과 반여해서 엊그제 최종적인 합의를 봤습니다. 대부분 우리가 이해관계에 부닥쳐서 보게 되면 결국은 처절하게 싸우게 되고 어느 한쪽이 이기고 어느 한쪽은 지고 이렇게 매듭이 지어집니다. 대부분 힘이 센 쪽이 이기고, 약한 쪽이 지게 마련이죠. 그런데 진 쪽은 어떻습니까. 결국은 상처를 받게 되죠. 이것은 옳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기고 지는 논리가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추진과정 속에서 생겼던 대립과 갈등을 화해로 풀어내야 합니다. 앞으로는 힘의 논리나 싸움의 논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끝없는 협력의 논리로 우리의 삶을 보다 더 풍부하게 가꾸어 내는 이런 흐름을 만들 수 있도록 문제가 정리되어야 합니다. 3년 정도 시간이 걸린 것 같습니다. 몇 일전에 최종적인 합의를 봤습니다. 원불교는 원불교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주민은 몇 백 년 동안 내려온 마을 공동체가 잘 지켜질 수 있도록 하고, 그러면서 그 동안의 갈등과 대립을 화해해서 풀고 앞으로는 더불어 함께 지역공동체를 좋은 내용으로 가꾸어 갈 수 있도록 하자고 해서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이런 등등해서 인연이 있는 셈이죠.
오늘 종타원님의 협박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끌려 왔는데 무슨 얘기를 할까? 했지만 뭐 뾰족한 얘기가 떠오르지 않더군요. 그래서 우리말에 맞고 푸자는 식으로 왔습니다. 이게 단순, 무식한 방법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거든요. 일단 부닥치자는 식으로 왔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 종교라는 것은 끝없는 자기성찰과 자기비판이 있어야만 종교로서의 생명력을 갖는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의 종교는 대단히 비관적, 부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원불교는 새로 성장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대단히 건전하고, 건강한 부분들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기존의 불교나 기독교에 비해서 말이죠. 그런데도 제가 교무님들을 많이 만나보는 일들이 생기는데 얘기를 해보면 역시 기성종교와 똑같은 길을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교무님들의 대화방식, 사용언어, 사회와 시대를 바라보는 문제의식 등을 보면 아~원불교도 별수 없이 다만 등치가 아직 적고, 세월의 이끼가 아직 덜 묻어 있어서 조금 덜해 보이긴 하지만 조금 덜하고 더 나아보이지만 별수 없이 전처를 밟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보여지는 가장 큰 이유는 일단 원불교라는 종교도 매사를 원불교라고 하는 종교의 교직의 집단이기의 틀을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가장 기본적으로 강하게 느끼는 부분입니다. 집단이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개인적으로 자기중심이 이기적, 또는 교리 중심의 집단 이기적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는 한 이미 그 부분에 대해서 뼈아픈 반성적 성찰과 자기비판을 통해서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그런 치열한 노력이 살아있지 못하고 집단이기라는 틀 속에서 매사의 문제를 다루어 가고 있다면 이것은 이미 종교의 생명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 사실 원불교에 기대가 많습니다. 나름대로 애정도 있는데 교무님들을 만나보면 역시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얼마 전에 조계종단에서 3급 고시 승가교육이 있었습니다. 승려가 된지 10년째 쯤 되는 사람들의 교육입니다. 해인사에서 있었습니다. 제가 천일기도하면서 나가는 곳이 종단에서 하는 일 두 가지 행자교육, 승가고시입니다. 두 군데 가서 강의를 하는데 저도 여기저기 많이 강의를 가는데 이번에 가서 하니까 도저히 안 되더군요. 종단에서 처음 시도하는 것 이였는데 제가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승려된지 10년만에 제도적 틀 속에서 시행된 교육인데 이 교육을 받아야 주지 임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언어가 스님들끼리의 언어밖에 없더군요. 일반대중의 언어가 없어요. 자기들끼리 밖에 통하는 언어만 얘기만 있어요. 저는 젊은 층이라고 생각하여 새로운 문제의식과 또는 시대적 언어를 시대적 문제를 갖고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도대체가 말이 안 되더군요. 자연스럽게 얘기를 오가게 해보자고 했는데 질문도 하는데 모든 것이 자기들끼리의 언어로만 하는 것에요. 어떻게 보면 스님들이 아닌 일반대중들이 본다면 화성에서 온, 아니면 달나라에서 온 사람들, 우주인들이 하는 얘기라고 할 것입니다. 60대 70대 분들이 하는 얘기라면 상관이 없는데 한국 조계종단의 미래를 책임질 승려들이 모여서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원불교도 자기도취적인 자기 안주하는 것이 세월이 지나도 더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조계종의 승려만큼은 안 되더라도 말이죠. 종교야말로 아주 뼈를 깎는 자기성찰과 자기비판이 살아있어야 됩니다. 이것은 그 교단 안에서 자유롭게 얘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는 언로가 자유롭게 소통이 되어야 합니다. 언로가 막히는 것은 인체로 말하면 혈관이 막히는 것과 같습니다. 종법사를 향해서도 안 된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직이 되다 보면 상하의 소통이 잘 되지 않습니다. 위에서 내려오고 밑에서는 받들기만 합니다. 그 집단이 살려면 언어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아니면 아니다 부당하면 부당하다고 하는데 있어 물론 우리가 교양있게 해야 합니다. 막하면 안 되죠. 언로가 살아있는 집단, 특히, 종교집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얌전하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 속의 진정한 생명력이라고 하는 것은 질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판이 서울중심이 아닙니까? 서울에 계신 분들, 특히 원불교를 중심해서 일하는 분들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과 고민들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조계종단에 고민이고, 더 나아가 교무님들도 그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일수록 과학적이고, 개방적, 민주적이어야 합니다. 제가 아는 원불교는 제도나 조직은 대단히 민주적으로 되어 있어 장점이 많죠. 그런데도 얘기를 해보면 비유하자면 화분의 꽃과 같은 느낌입니다. 화분에 있는 꽃은 곱죠. 그러나 그 화분 속에 있는 꽃은 그렇게 건강하지는 않습니다. 정말 싱싱한 생명력으로 결실을 가져다주지는 않습니다. 보기는 좋죠. 원불교는 잘 가꾸어진 화분속의 꽃과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신흥종교인데 뭔가 참신한 종교로서는 좀더 야생화적인 그런 활력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면 갈수록 그런 부분들이 약화되어가는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죠.
제가 이런 얘기를 집안에서도 하고 어디를 가도 얘기를 많이 하는데 한마디로 시비꾼이죠. 아픈 구석이나 쑤셔 되고, 덮어두고 싶은 것을 들쳐 내고 해서 욕을 많이 듣습니다. 오늘 종타원님께서 기도하는데 기도 얘기를 하면 되지 않느냐 하시더군요. 그래서 기도가 도대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기도를 하며, 기도를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글쎄요. 기도는 아마 사람들마다 기도의 목적이라든가, 또 나름대로 부여하는 가치관, 현실적으로 실현되어지는 내용, 결과 들은 각양각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 기도는 진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진실에 눈뜨고,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고, 진실에 하나 되고, 그 진실에 근거해서 바탕해서 일상적 삶을 가꾸어내도록 하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기도라는 것은 왜 진실에 초점을 두어서 얘기를 해야 되는가에 대한 이유는 첫째 저는 불교를 공부하면서 확인한 것은 존재의 진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이 토대하지 않고는 어떤 노력도 우리 삶의 문제를 풀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전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하는데 전도몽상의 사고방식으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변화를 일으켜내고 어떤 결과를 이루어낸다고 해도 그것은 또다시 환락이고 모순일 뿐이다는 거죠. 반야심경에 나옵니다. 원리전도몽상구경열반 전도몽상을 버리고 떠나면 그 순간 그 자리가 열반이다는 얘기죠. 이런 부분을 우리가 현실적으로 확인해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 ‘존재의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고, 볼 수 있으며, 실현되고 있고, 검증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에 없는 것은 다 허구다. 여기서 볼 수 없는 것, 실현되지 않는 것, 검증되지 않는 것은 다 막말로 하면 사기다라는 것이죠. 이것이 부처님이 선의 문제, 진리의 문제를 다루는 문제의식이고 기본서두였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현실을 모르고서는 절대 진리를 알 수 없고,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갈 수 도 없다 불교는 마치 현실과는 다른 무엇을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기 산중에 가있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아닌 것이죠. 오늘날 한국불교는 중국에 들어와서 특히, 선종불교가 도교가 많은 관계 속에서 영향들을 주고받았는데 그러다보니까 도교적인 삶의 양태와 불교의 삶의 양태가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도교적인 삶의 양태가 마치 불교의 삶의 양태인 것처럼 왜곡되게 인식되어지는 쪽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조금 정리해서 말하자면 도교적인 수도자상, 종교자상, 불교적인 수도자상, 종교자상이 다르다는 말이죠. 이처럼 다른데 한국불교를 지배하고 있는 풍토는 오히려 도교적이 수도자상, 종교자상으로 인식되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도교적인 수도자상은 꽃을 비유하자면 난초꽃과 같고, 불교의 수도자상은 연꽃과 같습니다. 두 꽃 다 아름답고 고상하죠. 그런데 분명 다릅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난초꽃은 더러운 곳에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꽃은 그 정대입니다. 연못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구잡스러운 것이 다 들어옵니다. 이런 혼탁하고 더러운 현장에 뿌리를 내리고 피는 꽃이 연꽃이라는 말이죠. 이것을 불교의 수도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불교적 삶이란 어떤 삶이냐하는 것입니다. 두 꽃 다 아름답지만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 어떤 현장에 두 발을 딛고 섰는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난초는 고상하죠. 꽃만 고상한 것이 아니라, 뿌리를 두고 있는 현장도 고상합니다. 더러운 것이 모이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연꽃은 고상하지만 두 발을 딛고 있는 현장은 아주 혼탁한 현장입니다. 음모, 시비, 다툼 있고 온갖 치사하고, 온갖 비인간적인 요소들이 있는 현장에서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정반대입니다. 진정 불교적 삶이라는 것은 시비가 있는 현장을 피해서 시비의 문제가 없는 현장에서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시비의 문제가 있는 현장에서 시비의 문제를 풀어서 화해를 가꾸어내는 역할, 삶이 불교적 삶이라는 것입니다. 싸움이 있는 현장에서 싸움의 문제를 풀어서 평화의 꽃을 피워내는 것이 불교적 삶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현장에서 잘못된 삶의 현실적 문제들,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인간을 불행하고 하고, 인간을 우습게 만드는 문제를 변환시켜 인간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고, 인간을 뭔가 품위 있도록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것, 역할이 불교적 삶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은 문제 덩어리다하고 요즘 정치를 가지고 얘기하면 주변에서 무슨 종교인이 정치판 얘기 하냐고 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문제입니다. 적어도 종교인은 그 시대의 사회의 안목과 문제의식이 없으면 종교인 역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을 모르고는 종교가 종교일 수 없습니다. 종교는 세상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원불교를 위해서 원불교가 있는 것이 아니고, 불교가 불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위해서 원불교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원불교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원불교 없어도 얼마든지 잘 먹고 삽니다. 세상을 위해서 불교가 존재하고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런 불교는 이 세상에 있을 가치가 없습니다. 불교가 없다고 해도 얼마든지 싸움 잘 하고, 음모 잘 하고, 사기 잘 치고 합니다. 적어도 종교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종교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종교는 세상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죠? 하늘과 땅만큼 다른 것입니다. 원불교가 원불교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생각하고, 원불교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것입니다. 원불교가 세상을 위해서 존재한다라고 한다면 원불교의 집단 이기적 사고방식은 설 땅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위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는 그 더러운 세상과는 다르게 뭔가를 해야 한다,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집단이기적인 사고방식으로 우리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가 불교, 원불교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지 않고서는 종교가 종교역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정치판 얘기를 해보면 도둑놈, 더러운 놈, 꼴도 보기 싫은 놈들, 나쁜 놈들, 고약한 놈들 하면서 정치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이 나라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 더럽다고 하면서 나쁘다고 합니다. 우리는 더럽고 나쁘다고 해서 피해 도망을 갑니다. 이것이 한국사회의 정치냉소주의입니다. 나는 착한 사람이니까 더러운 것과는 상종 안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우리가 잘못된 생각을 함으로 인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들의 안목, 통찰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가는 한 그 피해는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그런 마음으로 가는 한은 그 피해는 국민에게 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는 진정으로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서 계속해서 일하는 좋은 사람들은 계속해서 내 몰리게 됩니다. 그 사람들의 중심에서 일 할 수 있도록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일할 수 없도록 되는 쪽으로 몰리게 되어 있습니다. 사리사욕 한마디로 도둑놈심보를 갖고 정치를 하려고 드는 사람들만 계속 그 중심에 서서 이 나라를 마음대로 시끌케 만들고 끌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전 오늘날 정치판의 문제는 정치인들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종교인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국민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똥은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똥이 여기에 있으면 똥을 치워야 합니다. 냄새난다고 더럽다고 문 열고 나가면 똥이 치워집니까? 더럽고 냄새난다고 해서 똥으로부터 거리를 두면 똥이 치워지겠습니까? 절대 치워지지 않습니다. 정말 똥을 치워야 하는 거라면 가까이 다가가 치워야 합니다. 똥에 손을 대야 합니다. 정말 똥에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손대지 않고 치워주는 기계가 있습니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우리는 현실을 삶에 현실에 대해서 정확히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죠.
정치인들 다 도둑이라고 하는데 그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어떤 놈은 오백만원 훔쳐 먹고, 어떤 놈은 천만원 훔쳐 먹었다면 다 똑같습니까? 물론 도둑놈의 선상에서 보면 다 똑같지만, 한걸음 더 들어가 보면 액수에 따라 다르죠. 물론 도둑질하지 않은 정치인이 있으면 더욱 좋겠죠. 그러나 그런 사람이 마땅하지 않은 사람이 없으면 덜 훔쳐 먹은 사람을 찾아낸다 이 말이죠. 천만원인지 오백만원인지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눈 부릅뜨고 우리가 살펴야 됩니다. 피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정치로 하여금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게 종교의 역할입니다. 정계를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계를 정말 국민과 대중을 위해서 제대로 하도록 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계가 종교와는 무관한 것이라도 생각합니다. 이것이 모두 종교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만원인지, 오백만원인지, 백만원인지를 잘 살펴서 그중에서도 골라야 한다면 백만원짜리를 골라내어 일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치가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더러운 놈이라고 하면서 도망만 가면 결국은 천만원짜리 도둑이 다 알아서 하게 되고 맙니다. 여러분들 정치인들은 나쁜 놈들이라고 하지요? 그런 나쁜 놈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에 따라 가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 놓은 법에 따라 군대도 가야 되고, 교당을 지으려고 해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통찰해야 문제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교당 잘 가꾸고 우리끼리 곱게, 깨끗하게 오순도순 아름답게 살려고 한다면 괜찮겠죠.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산다 한들 한국사회의 전체 판이 추악하다면 무슨 의미를 갖겠습니까? 모든 국민이 고통과 절망 속에 빠져있는데 원불교인들이 자기들끼리만 좋다고 희희낙락한다면 과연 어떤 가치가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종교적 양심을 가지고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기도는 조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고상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바로 슬픔이 있는 곳에 슬픔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아픔이 있으면 아픔을 끌어안아야 하고, 시비가 있으면 시비를 끌어안아야 합니다. 절망이 있다면, 절망을 더러움이 있다면 더러움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끌어안고 해결하기 위해서 용해시켜서 새로운 승화로 새로운 전환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내 인생을 모두 바칩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물론 그런 것을 하기 위해서 특별한 시간, 장소, 수련, 훈련도 필요합니다. 우리의 역량이 부족하니까요. 그러나 그 기도의 중요한 의미, 기도가 지향하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구체화시켜야 할 그런 내용은 결코 법당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사회를 가장 시끄럽게 하는 것이 정치판인데 우리는 정확하게 읽어내야 합니다. 대선이 곧 다가오는데 정말 중요합니다. 결국은 국민들이 선택하는데 누가 과연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일할 사람인가, 누가 정치적인 명분과 원칙을 성실하게 지키는 사람인가, 누가 지역사회를 위해서 지역감정,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는가를 골라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결국 대통령이 못되도 상관은 없습니다. 우리 대중은 그런 사람을 선택하고 그런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하는데 역할을 해야 합니다. 비록 그 사람이 대통령이 못된다고 치더라도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하다보면 될 놈한테 밀어주자고 합니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종교인들은 같은 종교인에게 밀어주자고 합니다. 원불교인 대통령 후보가 나왔는데 천만원짜리 도둑놈이라고 해도 그놈을 밀어주자고 합니다. 원불교는 안 그러죠? 불교는 그럽니다. 종법사님이 대통령 후보 나왔는데 천만원짜리 도둑놈이라면 이건 안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렇게 종교인들은 시퍼렇게 살아 있어야 됩니다. 왜 그런가? 정의가 살아있지 않는 한 우리가 교화해야 될 중생이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평화가 실현되지 않는 한 우리가 교화하고 감싸 안아야 할 중생이 뼈저린 고통과 절망을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은 중생교화를 얘기하죠. 그러면서도 우리가 교화할 중생들이 고통과 몸부림을 치는 절망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이죠. 대통령 뽑는 것도 이런 것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이러고도 우리가 종교인이라고, 기도를 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종교인이야 말로 눈 부릅뜨고 현실을 주시하고 정확하게 통찰해 내는 문제의식과 안목을 길러내는 것이 기도이고 수행이라면 수행인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진실을 찾아 가는 길, 진실에 가까이 다가서는 일, 진실과 하나 되는 일 같이 진실에 토대해서 삶의 문제를 다루는,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이것을 위한 것이 저의 기도라고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아까 불쑥 부처님을 말씀드렸고, 그 다음엔 우리가 현실적으로 이런 것들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농사짓고 살다가 공장 짓자. 도시로 가자고 했습니까. 부족해서 불편해서 못살겠다했습니다. 고로 좀더 풍족하게 편리하게 살자가 바로 산업사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갖고, 더 편리하게만 살 수 있다면 행복해진다. 더 많이 갖고 더 편리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라고 줄기차게 노력해 왔습니다.
그리고 실제 대단히 많이 갖고, 대단히 편리하게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제는 됐어. 좋은 세상이야. 이젠 우리는 더 부족하게 없어 이만하면 충분해’합니까? 그렇습니까? 어떻습니까? 원불교안은 그렇죠? 바깥은 안 그런데. 더 많이 갖자, 더 편리해지자, 경쟁에 앞서가자, 싸워서 이기자 그러면 행복해진다. 해결된다는 사고로 세상을 살아가고 세상 또한 이런 사고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죽도록 밤낮없이 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떻습니까? 너도나도 불편하다, 죽겠다 아우성입니다. 너도나도 많이 부족하니까 더 많이 더 많이 얘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대선 후보들이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경제가 잘 돌아가도록 하겠다. 만불, 이만불 시대를 열어가겠다 합니다. 다 거짓말이죠. 정말 허구임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종교인들의 역할이 바로 이것이죠. 모든 사람들이 경제를 잘해야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기술이 발전이 되어야만 우리의 살길이라고 합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이것을 꿰뚫어 봐야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속고 있습니다. 적어도 종교인만큼은 성성한 눈으로 꿰뚫어 보고 여기에 속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해줘야 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의 증명은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을 짚어보면 압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거짓임에 속지 않고 거짓임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들어내기 위해서 역사적 반성이 요구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배고픈 시절을 보리고개라고 했습니다. 보리고개 당시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약 80불을 잡습니다. 지금은 만불이라고 하죠. 대충 백배입니다. 우리는 백배 더 많이 갖고, 백배 더 편리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연구결과를 보면 80불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자기 삶에서 느끼는 만족감과 불만족감과 만불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만족감과 불만족감이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불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불만족이 높고 만족은 낮고, 80불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자기 삶의불만족은 낮고, 만족은 더 높다는 결과입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더 많이 갖자. 더 편리해지자. 이것은 간단합니다. 물론 지역적, 개인적인 차이는 있습니다. 소유한 만큼 불만족은 더 커지게 됩니다. 편리가 더 고도화되면 고도화될수록 불만족은 더 커집니다. 이것을 이미 부처님은 2600년 전에 꿰뚫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죽을 고생을 다했는데 이제야 이런 것들을 보는 것이죠.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자기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으면 좋은 세상이잖아요. 만족감을 갖고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분명 좋은 세상입니다. 자동차, 집, 컴퓨터도 많고 돈도 많습니다. 그러나 만족은 없습니다. 평화, 인간다움, 아름다움도 없습니다. 오직 돈과 고도화된 기계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됩니까? 행복입니까? 좋은 자동차입니까? 평화입니까 아니면 더 많은 돈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이 경험적으로 엄연히 증명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21세기를 얘기하면서 새로운 정보화 사회를 얘기하면서 또다시 구태의연하게 더 많이, 더 편리하게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정신 나갔습니다. 미쳤다구요. 자살행위입니다.
요즘 소위 말하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성공하면 성공할수록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신자유주의정책이 순탄하게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이 지구는 위기로 내몰리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국민을 고통과 절망 속으로 몰아가고 있음에도 거기에 대해 아무런 의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미국이 하면 다 좋은 줄 압니다. 기가 막힌 상황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갖자. 더 편리해지자 그러면 행복해진다라는 것은 거짓말임이 드러났습니다. 경쟁에서 싸워서 이겨 앞서 나가자라고 허구입니다.
얼마 전에 끝난 월드컵의 열기도 간단합니다. 대단한 뭔가가 있는 것처럼 온갖 얘기를 하는데 전 사실 두려웠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온 국민을 미치게 만들고, 들뜨게 만들었는가의 그 실상은 무엇인가? 간단히 얘기하면 이기자, 성공하자, 그러면 만사형통이다라는 믿음과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죠. 거기에 대해 월드컵이 충족시켜준 것이죠. 1승에서 4강까지 말이죠. 이것을 온전하게 충족시켜 주었는데 과연 이긴다고 그것을 성취하면 만사형통일까요? 이건 아닙니다. 이것은 특수한 소수인들이 자신들의 속을 채우기 위한 허구적 논리일 뿐입니다. 이기면 된다, 성공하면 된다는 논리라든지.. 절대 이기는 것은 혼자할 수 없습니다.
성공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상대적입니다. 이기고 성공해서 기쁨을 누리고 있는 소수가 있다면 지고 실패해서 고통을 느끼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이기고, 성공하면 만사형통인가요?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에 신음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사람들은 우리의 이웃이 아닌가요? 교화의 대상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것을 주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기고 성공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소수의 논리입니다. 이기고 성취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된다라고 하는 논리는 이기고 성공하면 된다는 자신에게 유리한 소수의 논리일뿐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유혹해 내는 미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논리로 문제를 다루는 한 이기고 성취해서 기쁨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수천 배, 수만 배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 시달립니다.
우리가 뭘 봐야 됩니까. 이 모든 것은 다 사기입니다. 경쟁논리는 막말로 해서 힘센 사람,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한 논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적으로 보면 변화와 발전, 개발과 성장, 개혁과 진보 여기에 희망을 갖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힘들지만, 잘 안되지만 변화와 발전이 이루어지면, 개발과 성장이 이루어지면, 개혁과 진보가 이루어지면 우리의 희망이 실현될 것이다라고 희망을 걸고 온 힘을 쏟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100년 전에 비해서 이 모든 것이 대단하게 진행이 되었습니까. 21세기 지구촌의 역사라는 것은 인류 역사의 기적의 역사입니다. 경제성장으로 보나 과학기술의 고도화로 보나 정치사회의 민주화로 보나 그 여타의 여러 가지 일을 놓고 보더라도 인류역사에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그런 변화와 발전, 개발과 성장, 개혁과 진보가 이루진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21세기라고 하는 지구촌의 역사의 내용은 어떻습니까. 아름다웠습니까? 평화로웠습니까? 인간다웠습니까? 만족했습니까? 정반대죠.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살상과 파괴의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21세기 지구촌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금 모두가 위기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빈부 차는 더욱 심해지고 인간관계속에서 불신은 더욱 악화되고, 삶은 더욱 인색, 불안, 초조해지고 모든 여유도, 평화도, 자유도, 아름다움도 박탈돼 버렸습니다. 그뿐입니까. 거기서 더 나아가서 앞으로 이 지구상에 인간생명을 과연 얼 만큼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하는 생명위기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비인간화 되고 있다. 이 지구촌의 생명이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경제, 과학기술이라고들 말합니다. 경제소득 만 불이 아니라 십만 불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로봇이 모든 일을 다 해준다고 해도 우리의 고통과 불행은 더욱 악화되어질 뿐입니다. 과학이라는 환상은 믿을게 못됩니다.
자 이렇게 우리가 짚어봤을 때, 변화와 발전, 개발과 성장, 개혁과 진보가 이루어지면 잘 된다고 했는데 왜 이런 불행한 역사가 되고 말았는가. 비인간화와 생명위기의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는가 왜 이런 결과가 이루어졌는가의 원인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는 나쁜 마음으로 한 것이 아니거든요, 정말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정말 행복하게 살아 보려고, 심지어 그것을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 했거든요. 온갖 전쟁도 다 치루었습니다. 전쟁 괜히 한 것이 아니죠. 평화를 위해서, 인류의 자유를 위해서였죠. 그런데 이루어진 결과는 비인간화, 생명위기입니다. 그럼 적어도 이쯤에서는 또다시 많이 더 편리하게 경쟁에 앞서나가자, 싸워서 이기자라고 해서 달려온 게 이 모양인데 달려온 결과가 이 모양이면 그러면 도대체 뭐냐 원인이 뭐냐를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원인을 찾지 않고 경쟁에서 앞서나가자, 싸워서 이기자를 외치고 있습니다. 이건 너무나 갑갑하고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 원인을 찾아야 됩니다. 불교는 인과의 법칙의 가르침을 주는 것 아닙니까. 부처님은 모든 문제는 지금 여기 자신에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문제가 발단한 출발점도, 해결의 출발점도 자기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자기를 제대로 알고, 다스리는 데서부터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를 보면 자신을 알고, 자신을 다스리는 지식과 능력의 측면에서 보면 요만큼도 발전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훨씬 퇴보했습니다. 이해, 용서, 나눔, 겸손,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발달한 것은 온통 나 아닌 다른 것, 나 아닌 상대입니다. 나 아닌 다른 것을 알고 다른 것을 다스리는 지식과 기술, 능력은 고도로 발달했습니다. 여러분 자동차, 컴퓨터 다들 잘하시죠?
온통 나 이외에 것에 대해서 관심도 많고, 너무나 집중해서 노력도 하고 또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잘 알고 잘 다스립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자기를 알고, 자신을 다스리는 지식과 기술 등 경험들을 중요한 가치로, 최고의 가치로 삼고 문제를 다루어가지 않는 한 천지를 개혁하는 변화와 발전, 개발과 성장, 개혁과 진보를 백 번, 천 번 진행시켜 봐야 그것은 역시 비인간화, 생명위기라고 하는 상황을 계속 재현시키고, 악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역사가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선 너무 무지합니다. 자신을 다스리는데는 너무나 무능력하면서 나 아닌 다른 것을 다스리는데는 너무나 상관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는 한 개인소득 십만 불이와도, 모든 것들이 자동화되는 시대가 와도, 지구촌이 아닌 우주촌 시대가 와도 그것은 온통 싸움판이고, 웃음판일 뿐이고 끝없는 고통과 절망의 악순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들을 종교인들이 꿰뚫어보고 이런 부분들을 짚어주고,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 한, 첫째로 종교가 스스로 종교역할을 포기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고, 이 사회가 우리가 교화해야 할 중생이 희망을 갖을 수가 없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지도란 바로 자기를 제대로 알고, 자신을 제대로 다스리는 지식과 능력을 길러가는 신앙적실천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자신을 알고, 자신을 다스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자기라는 문제로 돌아와 보면 우리는 다 무식하고, 대단히 몰상식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 자존심 상하시겠지만, 피해갈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자기를 얼마나 모르고 있는가, 얼마나 무지한가에 대해 짚어봅시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면 정치판의 문제가 곧 나의 문제이고, 저 아프카니스탄의 고통도 나의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잘 모르니깐 정치판은 정치판이고 나의 고상한 삶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다 무지의 결과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아픔도 어떤 슬픔도 자신을 제대로 알면 나의 아픔, 나의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모르니까 추한 것은 네 것, 고상한 것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상한 것이 따로 있는 것처럼 쫓아다닙니다. 이것은 불교가 아니죠.
부처님이 깨달으신 방법이 연기법입니다. 이 연기적 사고방식으로 모든 문제를 파악해야 합니다. 정신이든, 육체든, 정치든, 종교든, 내가 됐든, 네가 됐든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연기적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문제를 다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가 제시한 길입니다. 연기법은 관계성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로서로 돕고, 의지하고, 주고받고 하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이 세상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마음이라고 하는 심변존재에서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한국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하고 마음이라고 하는 심변존재에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독교와 똑같은 얘기입니다. 글자만 다른 것입니다. 신과 마음의 글자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같습니다.
불교는 유심론도, 범신론도, 다신론도, 일원론도, 관념론도 다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 우리가 생각하는 유심론은 물질과는 다른 정신적인 영혼은 불멸하다고 하죠. 그런것의 유심론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런 것은 다 부처님이 부정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주장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62종의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도사회에서 내려온 전통사상들도 모두 다 부정했습니다. 다 존재의 실상에 대해서는 전부 다 무지하다고 해서 이 세상은 연기적 존재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독창적인 언어입니다. 다 비판하고, 부정하니까 그것은 다 존재의 실상, 진실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왜곡되게 인식하고, 표현하는 말들이다 하여 존재의 실상에 맞는 개념을 찾으려면 관계성의 논리, 진리인 연기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연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불교도 선이든, 정전이든, 염불이든 연기로 해석되지 않으면 불교가 아닙니다. 한국불교가 이 점을 놓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나라는 문제로 다시 돌아와 봅시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목숨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목숨이죠. 따지고 보면 이 한목숨 안전하게,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종교도 같습니다. 살아 있어야 정치를 얘기하든, 종교를 얘기하든 할 것 아닙니까. 하나밖에 없는 목숨, 절대적 가치를 갖고 있는 목숨,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되는 그런 가치 있는 목숨은 어디에 있습니까? 깜깜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인생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주시하지 않았나, 내 삶을 얼마나 건성으로 바라보지 않았나하는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치에 대해 나쁜 놈만 살피고, 자동차만 살피고 정작 나라고 하는 존재, 목숨에 대해서는 관심도 갖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껏한다는 것이 허준이만 만나면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엉뚱한 것에만 쫓아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내 목숨에 대해 이렇게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몰상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도리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숨을 얘기할 때 내 목숨이 있고, 네 목숨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따로 따로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온통 이 세상은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 그물처럼 얽혀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연기라고 합니다. 하늘의 태양이 존재하지 않아도 여러분의 목숨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공간적으로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실질적으로는 태양이 존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살수가 없습니다. 태양만 그렇습니까. 달은 달대로, 별은 별대로, 밤은 밤대로, 낮은 낮대로.. 나라는 존재는 나 아닌 모든 것들에 의지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를 하늘보다 높고, 땅보다 크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를 낳아준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효도합니다. 효도하지 않으면 사람의 도리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불교도 효를 대단히 강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지로는 어머니의 어떤 사랑과 노력으로도 나를 낳아주고 길러줄 수 없습니다. 다만 어머니의 사랑과 노력은 나라는 존재를 성립시키고, 나라는 존재의 삶이 유지되어 주게하는 수천, 수 만 가지의 조건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하늘의 태양과 물이 없다면 어머님의 어려분의 삶을 유지시켜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침들 드셨죠. 쌀이 어디서 나옵니까. 흙에서 나옵니다. 흙이 없으면, 물이 없으면 삶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태양이 우리를 낳아주고 길러줬습니다. 흙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람이, 산천초목이, 물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부처님은 증명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내 목숨이 내 바깥과는 상관없는 내 것이 따로 있는지 없는 것인지는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민감한 것이 산소입니다. 코 막고, 입 막고 있어보십시오. 내 목숨이라고 하는 것이 내 것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도 열흘 안 마셔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실을 정확하게 짚어보면 내 목숨이 내 것이 아닙니다. 온통 너에 의지해, 상대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나라는 것의 존재는 어떻게 되먹은 존재라는가에 대해 하나님이 만든거다. 마음이 만든거다, 정신이 만든거다라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온통 관계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목숨은 관계의 존재입니다. 그 관계가 단절되면 목숨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 관계가 뒤틀리면 목숨은 병드는 것입니다. 오염된 물을 마시면 병들죠. 이것은 관계가 뒤틀린 것이죠.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관계가 단절된 것이죠. 온통 관계가 바로 나입니다. 이것을 연기의 존재라고 합니다. 온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무형, 유형, 시간, 공간 모든 것들이 총체적으로 관계해서 나라는 존재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나 아닌 것은 무엇이겟습니까. 흙이 곧 내 생명이고, 산소가 곧 내 생명입니다. 내 생명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것도 나와 무관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하면 나라고 하는 신령스러운 물건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연기론적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체적, 신비주의입니다. 불교는 철저하게 이 실체적, 신비적인 것을 부정합니다. 온통 나뿐이다 내가 곧 흙이요, 태양이요 하는 것이 바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것입니다. 그리고 흙, 태양, 물 등은 절대적 가치입니다. 둘이면 안됩니다. 이것은 절대자입니다. 이것을 정확히 짚어보면 이 세상에 나 아닌 것이 없다, 내 생명이 아닌 것이 없다 이것이 연기론적으로 봤을 때 그렇습니다. 자 이렇게 짚어보면 이 세상에 어떤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 어떤 슬픔이 나의 슬픔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을 제쳐두고 무엇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존재의 진실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언어로 표현할 때, 연기적의 존재라고 합니다.
제가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 존재의 진실에 제대로 눈뜨고, 더 가까이 다가서고, 하나 되고, 일치하도록 삶의 문제를 가꾸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좌우대립에 의해서 지리산에서 희생을 당한 분들을 위해 기도를 내세웠느냐는 제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그분들을 천도하겠습니까. 다만 모든 문제가 잘못되는 것도 결국은 존재의 진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지해서,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존재의 진실에 대해서 눈뜨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바로 알고 그분들과 바로 가자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가신 분들에게 같이 갑시다, 그 길 가시는데 길을 돕겠습니다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 분들에게 부처님께서 이것만이 참 길이다. 이것만이 참 희망이다라고 하셨기 때문에 제가 기도해서 함께하자는 것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도올 김용옥씨가 연기에 대해서 “연기법은 불교의 것이 아니다, 21세기 인류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 진리로서의 세계관이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불교인이 하면 설득력이 없습니다. 김용옥이라고 하는 제 3자가 얘기하는 것에서 대단히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연기론은 불교의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인류가 서로 공유해야 할 진리로서의 세계관과 철학이다라고 했습니다. 21세기의 보급은 바로 연기법을 가르치고 있는 불교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을 놓고 보면 불교인들에게 주어진 책임은 대단히 막중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잘못되고 있는 일차적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묻고 있는 가르침이 제일이라고 믿죠. 그러면 제일의 가르침, 진리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했으면 잘못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제일의 가르침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특정인의 잘못,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닌 것입니다. 종교인이 양심적으로 정직하려면 우리가 서야 할 입지가 바로 여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은 잘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책임도 종교인에게 있습니다. 제가 기도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문제를 보다 더 분명하게, 확고하게 문제를 다듬어 내고, 돌아가신 분들에게도 당신들이 아무리 좌익, 우익이니 떠들어봐야 좌익도, 우익도 존재의 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때문에 나타난 결과일 뿐이며, 다 놓고 제대로 된 길을 가자, 왜냐 이 길이 아니면 안된다입니다. 존재의 진실에 토대해서 좌도 우도 얘기가 되지, 존재의 진실이라는 기관이 없이 좌는 좌대로, 우는 우대로 얘기하면 이것은 끝없는 모순일 뿐입니다.
이런 길이 지금까지는 오류가 있었다하더라도 적어도 오늘부터는 저 만큼, 제가 살고 있는 실상사만큼, 그리고 나와 인연 맺어져 같이 하고 분들만큼, 이런 것을 갖고, 이런 길을 가자 그리고 끝없이 사회를, 대중을 위해서 강력히 제시하고, 설득하고, 주장하자는 것이 저의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을 불교적으로는 존재의 진실에 눈뜨는 것을 진리라고 하고, 존재의 진실에 맞게 살아가는 것을 자비라고 합니다. 그런데 존재의 진실이라는 것은 다른 게 없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낳아주고 길러줘서 존중하고 감사하는 것 아닙니까. 태양도, 물도 존중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태양이 나를 낳아주고 길러줬죠. 그래서 21세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살아온 세월에 대한 냉철한 반성적 성찰이 요구됩니다. 반성적 성찰을 통해서 우리는 진실에 눈떠야 되고, 진실에 눈떠서 보면 존중과 감사의 삶의 관계를 가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존중과 감사. 바로 나와 너, 이웃과 이웃, 국가와 국가, 인간과 자연 이 모든 관계가 공존과 협력과 나눔이구나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존중과 감사의 관계로 삶의 문제를 다루어가는 것, 이 길이 종교가 가야 할 길입니다.
좌도 우도, 자본주의도, 과학, 기술도 희망이 없습니다. 적어도 종교인만큼은 이것을 알고 정확하게 짚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당면한 정치판이나 남북문제에는 이런 문제의식과 입장이 같고, 정말 이런 것에 맞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현실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남북문제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전쟁문제가 상당히 심각한 수준입니다. 미국이 힘이 있다고 함부로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이라고 함부로 행하고 있습니다. 계속 미국의 강경론이 정당화되어질 수 있는 명분축적 과정을 밟아나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국내가 그런 것을 이용해서 자기의 세력을 키워내려는 것이 심각합니다.
어쨌든 이번 대선의 판가름은 경제가 아니라 남북문제를 가장 잘 풀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또 지역 구도를 누가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중요한 판단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경제문제가 나와야 합니다. 이런 부분들에 있어서 종교인들이 특히 대선이라고 하는 소용돌이치는 상황에서 정확하게 통찰해내고, 소신을 갖고, 그런 입장들을 잘 견지하고 또 국민들로 하여금 그런 태도를 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저는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능력이 없어서 법당에서 기도하는 겁니다.
제가 능력이 있으면 법당에서 기도만 하지 않습니다. 바로 삶의 현실에 정의가 실현되도록 또는 평화가 가꾸어지도록 각자가 절망과 고통을 받지 않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 진정한 기도이고 종교적 실천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오늘 드린 말씀은 제가 믿고 있는 것을 주관적으로 과감히 풀어놓았습니다. 여러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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