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모묘원의 하루는 목탁소리, 나무아미타불, 영천영지 영보장생, 망자의 천도에 슬픔으로 노래하는 유족들, 함께한 대중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시작되고 끝이 나지만 늘 반갑기만 하다. 1년 365일 휴일이 없는 망자의 행렬이 이어진다. 간혹 가다 꽃상여 탄 상두소리가 요령을 치기도 한다.
영모묘원의 개척불사가 시작되고 망자의 행렬이 이어질 때 반갑기만 했다. 그러나 마냥 반가울 수 만은 없었다. 자살한 자, 교통사고 난 자, 물귀신 된 자, 부모 가슴에 묻은 자, 오랜 병마로 사망한 자 등은 삶의 비애이자 염려의 대상이기에 생사이별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대산종사의 하루 일과 중 제일 먼저 반갑게 묻는 질문 중 하나가 “오늘은 몇 분이 들어오시는가?” 였다. 매일 매일 묻고 물어도 질리지 않고 물으시기에 입묘자가 없으면 오히려 죄송할 정도였다. 그러던 차 우리 시자들은 대산종사의 행동반경을 조금이라도 넓혀드릴까 궁리하던 중 수계농원 근처에 조성중인 전주 제3공단을 방문했다가 수계농원에 예고도 없이 갑자기 들렸다.
대산종사가 뜻밖에 찾아왔으니 농원장 이하 직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땀에 저린 작업복 차림에 흙 묻은 손으로 대산종사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대산종사는 농원을 둘러보며 “수계농원이 많이 변했다. 대종사와 정산종법사의 성심이 어려 있는 곳이니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 동안 교단 인재 양성의 산실이었다. 모든 일에 앞서 수계농원의 방침을 인농(人農), 사람 농사짓는데 초점을 맞추어 나가야 하겠다”고 했다.
이 일로 인하여 수계농원은 교단적 관심사로 부각되었고, 학원법인으로 되어있던 땅을 교단 소유로 이전하게 되었다. 또한 정전마음공부가 태동하는 계기가 되어 지금의 마음공부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영모묘원에서 수계농원으로 매일 내왕하며 대산종사는 교단 창립정신의 원형을 이곳에서 찾으려 하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공단에서 피어오르는 굴뚝 연기를 보고 교단의 정신적 보루를 지켜내기 위해 노구에도 불구하고 그 곳을 찾으신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대산종사는 영모묘원의 정양기간 중 반은 수계농원을 내왕하였다. 영모묘원이 집이라면 수계농원은 영육쌍전의 일터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단에서 농원에 골프장을 건설하려고 홍역을 치르다 유야무야 되었다가 지금은 다행히 젊은 산부처들이 농원의 부활을 꿈꾸고 있으나 요원할 따름이다. 대성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