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걷다 보면 걸음을 천천히 옮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며, 종종 걸음을 치는 사람들도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걸음 행태가 다르다.
이 사람들 중에는 호흡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 호흡으로 아침, 점심, 저녁을 시작한다. 잠을 자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호흡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고있다. 그러나 호흡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호흡을 아주 당연히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호흡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질 높은 호흡이 어떤 것인지 알아차린다면 그때부터 상황은 달라진다. 한 호흡을 하더라도 호흡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그냥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 호흡이 자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알아차림을 통해 식사공양을 하더라도 한 호흡, 말을 하더라도 한 호흡, 웃더라도 한 호흡, 공부하더라도 한 호흡이 계속된다.
그러다 내면 의식이 확장되면 호흡을 하되 호흡을 잊을 때가 있다. 에너지 흐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경우다. 흐름이 있으되 고요함이 계속된다. 일상의 온전함 속에 초롱초롱하다.
이 모든 것은 일상 속에 있는 흐름이다.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어디서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드러난 것이다.
얼마 전 여여선방에서 한 공부인과 대화를 하면서 그 자리를 다시 생각해 본적이 있다. 그의 말은 이랬다. 밖에서 들려오는 것은 자기 소식이 아니라고 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이야기가 참고는 될지언정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이치다. 들으면 간단한 내용이지만 깊이가 있다. 호흡이 그렇다. 한때‘이렇게 하면 좋다. 저렇게 하면 좋다’는 호흡 메뉴를 받아들고 외식을 즐긴 적은 있다. 그 자리를 알아차렸을 때 호흡은 평범함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알아차림을 계속하다 보니 자기 나름의 호흡이 있음을 알게 됐다. 이 자리는 언제 어디서든 만나게 되어있다. 지난 11월 23일(월)부터 27일(화)까지 진행된 호남종교인 영성 문화회(호령회)에서 진행한 베트남 문화기행 감상담에서도 그 소식을 들었다.
5개종단 20명이 사찰과 주변 관광을 한 후 버스에서 소감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차례대로 발표하던 중 광주에서 목회를 하는 어느 목사께서 말한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길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심금을 울렸다.
“이 순간을 생각하면 통하리라.”
호흡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 하단, 중단, 상단이 막 통한다. 밝아짐을 느낀다.
정산종사께서는 법훈편 72장에서“막힌즉 어둡고 통한즉 밝다.”고 하셨다. 호흡은 하단 따로. 중단 따로, 상단 따로가아니다. 한 기다란 통에서 호흡이 논다. 에너지가 물고기처럼 막 헤집고 다닌다.막혀 있던 회로가 차례로 열린다. 쩍쩍소리를 내기도 하고 조용히 부드럽게 그 자리를 알려 주기도 한다.
정산종사께서 산동교당에 주석하고 계실 때‘효천뇌우일성후 만호천문차제개(曉天雷雨一聲後萬戶千門次第開)’란 글을 지은 것과 호흡을 연관시켜 보았다. 번역하면 새벽 하늘 우뢰 비 한 소리 뒤에, 모든 집 모든 문이 차례로 열린다는 내용이다.
이런 문이 열리게 하는 것은 결국 호흡과 연결된 에너지다. 몸이 열리는 것을 직간접으로 체험 하게 한다. 우주와 통하게 한다. 결국 호흡을 제대로 한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늘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교단 지도부에서도 하늘사람들에게 투자해야 한다. 사람이 없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호흡을 제대로 하는 하늘사람들이 교단의 에너지체임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