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특별기획] 자유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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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특별기획] 자유를 향하여
  • 관리자
  • 승인 2016.08.12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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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특별기획, 원불교 2세기 이제는 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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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치유여행이라는 것을 만들며 '노매드 치유 연구소'를 설립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한 일은 치유의 방향을 단순화하고 구체화하는 것이었다. 2012년 우리 사회에 힐링 열풍이 불면서 콘서트에도, 음식에도, 화장품에도 모두 힐링을 붙이는 것이 유행이었다. 심지어 어느 여행사는 신문에 힐링 여행을 대대적으로 광고했는데 내용은 가평에 가서 밤 줍는 행사였다. 힐링은 넘쳐났으나 역설적으로 구체적인 힐링은 어디에도 없었던 시절. 그러므로 이 관념적이고 광범위한 힐링의 추상성을 어떻게 실제화 할 것인가가 나의 첫 번째 과제였다.

나 는 회 사 의 사 이 트 주 소 를 'herennow.com'으로 정했다. '지금 여기'가 내 치유의 중심어가 되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을 챙기고 주의 집중하기, 이것이 내 치유의 실천적 지침으로 정해졌다. 모든 명상과 요가와 심신치유 프로그램은 자기 마음과 몸을 생생하게 알아차림 하는 것을 기본으로 통일성 있게 구조화했다.

붓다를 위시한 많은 선각자들과 수행자들은 알아차림을 통해 망상과 번뇌가 차단된다고 했고 현대의 정신과
학자들은 이것이 스트레스를 없애고 마음의 평화를 찾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자유를 회복하는 개인의 치유라고 정리한다.

'자유'. 나는 그간 8권의 책을 쓴 작가로서,「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카잔차키스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조르바를 통해 말하는 자유의 사상에 크게 감명 받았고 내 수행의 큰 빚을 카잔차키스에게 지었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그리고 그가 말하는 자유는 소설 속 조르바의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자세하게 설명된다.

“새 길을 닦으려면 새 계획을 세워야지요.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잠자고 있네',' 그럼 잘 자게',' 조르바, 지금이 순간에 자네 뭐하는가?',' 일하고 있네',' 잘해보게',' 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하는가?',' 여자에게키스하고있네', '조르바, 잘해보게. 키스 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

지금 여기에 머물며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것. 즉 감정의 포로가 되거나 책임감과 도덕률 등의 사회적 구속에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닌,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주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 카잔차키스가 조르바를 통해 보여주는 자유의 구체적 모습이다.

나는 우리 회사의 2박 3일 집중 명상수행의 상품명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같이'로 정했다. 불교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 가지고 온 문구다. 바람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물에 조차 걸리지 않을 만큼 거침없이 자기 행보를 간다. 가고자 하는 곳을 간다. 닿고자 하는 곳에 닿는다. 과연 우리는 살아가면서 그럴 수 있을까?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화를 내거나 어떠한 욕망에 휩싸일 때, 그때의 주인은 나의 감정일까, 혹은 나일까? 탐진치(貪瞋癡)라는 삼독(三毒)에 빠져있을 때 나는 내 몸의 주인일까? 아니면 탐욕과 분노
와 무지함이 나의 주인일까? 우리가 명상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나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메타적 인지 능력을 키우는 것에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감정에 들러붙어 있는 나를 감정으로
부터 떼어낼 수 있게 된다. 내 의도를 면밀히 알아차리면서 내 의도가 나를 좌지우지 하지 못하게 한다.

자신의 감정과 느낌 등을 일정한 거리감으로 바라볼 때 나의 자유는 확보된다. 그리고 이 자유를 향한 개인의 치유는 정확하게 소태산 대종사의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원불교의 개교표어와 맞닿는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스스로가 주체적인 자유인이 되라는 이 선각적인 인간중심적 말씀은 과거에도 앞으로도 개인의 치유가 자유정신, 즉 개인의 주권과 주체성을 회복하는데 있어야 함을 지시한다. 혹 이러한 말들이 당신의 일상적 삶과는 무관하게 들리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풀어보자. 우리는 잘 살고, 잘 먹고,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며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리는데 이상하게 더 좁은 세상을 산다. 서울에서 강하나 건너는 것이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을 가는 것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누군가 친한 사람의 얼굴 한번 보는데 “언제 한번”이라는 말만 백 번째다.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이걸 하자니 귀찮고 저걸 하자니 망설여진다. 그러면서 점점 더 외로워지고 신경은 예민해지며 마음은 붕 떠있다.

이것이 당신의 이야기라면, 이렇게 되물어보자. 당신은 자유로운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는 당신만이 안다. 만일 자유롭지 않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유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신의 개벽이며, 또한 이것이 개인의 치유문화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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