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방안 창문을 열고 밖을 쳐다보았다. 이리저리 살피다보니 어제와 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 왔다. 100년이 족히 넘은 교당 은행나무에 변화가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던 노랑 은행잎들의 흔적을 바닥에서 찾을 수 있었다. 간밤에 불던 바람결에 무거운 짐을 벗어 내려앉은 모양을 띠었다.
바람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러움이다. 그 모습이 그렇게 편안하게 보일 수 없었다. 다시 은행나무를 쳐다보니 환한 가지 끝 사이로 맑은 하늘이 보이고 작년 까치집도 보이고 까치의 움직임도 보였다. 은행잎으로 가득 차 있을 때보다 비어 있으니 보이는 이치다.
매년 이맘 때쯤 이 모습을 바라보았다. 차츰 차츰 느낌이 달랐다. 보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 의식에 변화가 있었다. 그렇게 성장이 되었다. 찾다 보니 찾아 지고, 구하다 보니 구해졌다. 진리는 알게 모르게 선물을 주었던 것이다.
그 해답은 호흡이었다. 호흡은 꽉 참에서 벗어나 비움의 세계로 인도했다. 보이는 것을 더 확연하게 했다. 적확한 느낌들이 온 몸을 감쌌다. 비워진 곳에는 에너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에너지의 증폭이 가속화 되고 나면 다시 비움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 시작과 끝에는 늘 호흡이 함께했다.
대산종사께서도 거래편 4장에서 세 가지 바쁜 공부 중 호흡에 대해 강조하셨다. “첫째 현실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공(空)인 것을 깨달아 마음의 애착 탐착을 떼는 공부를 바삐 할 것이요, 둘째 천하에 제일 귀한 이 생명이 호흡 한 번 하는 사이에 있는 줄 알아서 무량수를 발견하여 생사 해탈 공부를 바삐 할 것이요, 셋째 현실의 잘되고 못되는 것이 다 내가 지어 받는 줄 알아서 앞으로 잘 짓는 공부를 바삐 해야 한다.”밝히고 있다.
물론 호흡에는 질량의 차이가 있다. 누구나 다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지만 그 질량은 다르다. 제대로만 호흡에 집중하면 몸과 마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밀물과 썰물처럼 숨의 흐름이 있다. 이 속에서 밝음을 얻게 된다. 생명의 온전함을 유지하게 된다.
더 나아가 한 소식이 밀려온다. 그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숨소리가 편안하고 편안한 숨소리에 미소를 지을 수만 있으면 정진은 계속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체질이 한 몫한다. 대산종사께서는 체질별 선의 필요성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단전 집중과 호흡은 필수다.
대산종사께서는 법문집 3집에서 “체질이 태음인이나 건장한 사람은 행선보다 좌선이 더 나을 수 있다. 임제선사나 동산 같은 사람은 열흘 안 먹어도 좋고 열흘 앉아있어도 좋다 하여 죽기 아니면 살기로 꽉 들어앉아 힘을 얻기도 하였으나 지금 사람들은 대개 소음과 소양인이 많으므로 행선과 사상선(事上禪)을 많이 시키는 것이 좋겠다. 그러니 자기 체질에 맞게 앉아서 하든지(坐禪) 서서하든지(入禪) 누워서 하든지(臥禪) 다니면서 하든지(行禪)하여 계속적으로 동(動)과 정(靜)이 골라 맞도록 하여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 호흡에는 과거, 미래, 현재가 함께 존재한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와 미래의 공존함을 보게 된다. 현재 한 호흡에서 과거의 호흡을 살펴보고 미래의 호흡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
호흡을 하는 것도 살펴보면 의식의 자유와 호흡의 자유와 육신의 자유를 얻기 위함이다. 생사 거래에 대 자유를 얻고 육도 윤회를 임의 자재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연말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동안 동정(動靜)으로 생활하면서 단전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할뿐이다. 어느 처지에 있든, 어느 장소에 있든 호흡의 소중함을 안다면 행복한 나날이 계속 된다. 새해에는 이 행복한 호흡을 찾는 공부인들이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