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경성 서울 시가지를 둘러보고 그 소감을 말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이 문명의 혜택을 입는 것은 하나는 물질의 문명이요 하나는 도덕의 문명인 바, 물질문명은 사람들의 생활에 한없는 편리와유익을 끼쳐주니 그 은덕을 입은 사람으로서 그것을 발명하여 준 여러 연구자에게 감사한 뜻을 표하지 아니할 수없다.
물질은 현상에 나타난 것이므로 그 효과가 빠른 반면에 변천이 있는 것이며 그 성질이 고정한 반면에 국한이 있게 되므로 그들의 명예와 공덕은 드러나기도 쉽고 묻히기도 쉽다. 도덕문명은 사람의 정신에 근본적 원리를 끼쳐 주니 그 은덕을 입은 우리들이 그를 천명하신 모든 성철(聖哲)에게 감사할 줄 몰라서 되겠느냐.
도덕은 원래 무형한 마음을 단련하는 것이 그 공효가 더딘 반면에 유상 무상 일체법을 포함치 아니함이 없으니 제생의세하는 위대한 힘이 어찌 한 세상에 그치고 말 것인가.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물질문명의 현상은 찾을 줄 아나 도덕문명의 근본은 찾는 자 적으니 이에 큰 유감이다.”(박용덕, 『금강산의 주인되라』, 418쪽, 교의품 31장)
당시 경성은 근대자본주의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곳으로,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그러한 핵심부에 드나 드시며 물질문명을 파악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대종사님께서는 물질문명에 그렇게도 관심을 두시고 탐방하시었으며 고민하셨는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종사님의 구도에는 물질문명에 대한 고민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대각 후에 사회를 관찰하고 별안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구도과정 자체에 물질개벽에 따른 정신개벽의 끝없는 정진적공이 축적되어 있었다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개벽의 적공이 활짝 꽃피어난 사건이 병진년 대각이요, 이 구도과정의 총체를 사회현상에 대입하여 표출한 것이「개교표어」인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의 대각은 '정신개벽의 대각'으로, 이 정신개벽은 개인차원의 고(苦)의 해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물질문명에 기초한 문명적 차원의 파란고해(苦海)가 전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장차 이 일을 어찌 할꼬'의 「이 일」은 바로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문명개벽의 서원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의 생활권역인 법성포는 조선왕조의 조세창고이며 칠산바다의 풍성한 수산자본의 집결지이며 동학농민혁명의 활동지이자 근대 제국주의의 물질문명이 강제로 유입되었던 창구입니다.
이처럼 법성포는 전근대와 근대의 문명이 넘나드는 통로로, 길룡리에서 법성포로 흘러가는 와탄천은 이러한 근대 물질문명이 유입된 고속도로였던 것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는 새로운 시대의 전환이 꿈틀거리는 법성포를 왕래하며 구도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대종사 열반 전까지 상당한 비중으로 많이 상경하셨던 서울 경성은 물질문명의 총화였습니다. 그러므로 반대급부로 소태산에게있어 경성은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른 정신문명을 모색하는 도시이기도 하였습니다. 소태산은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을 아울러 꽃피우고, 정신문명을 확장하여 물질문명을 선용하는 당면과제를 안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소태산의 책임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소태산에게 있어 선천과 후천의 기점은 과학의 발달에 의한 물질문명의 태동이며, 정신문명에 의한 물질문명의 선용이 후천개벽 시대의 과제상황이며 소태산의 출현 동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태산의 '생활불교'란 물질문명의 생활에 기반한 불법의 활용이며, '불법시생활(佛法是生活)' 표어는 정신문명으로 물질문명을 선용하는 것이요, 물질문명에 바탕한 정신문명인 것입니다. 즉 도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사람이 당연히 밝아야하는 인도(人道)상 요법에 있어서도, 이 인도의 배경은 바로 물질문명입니다. 그러므로 소태산에게 있어 생활이나 인도는 다 물질문명을 전제한 것입니다. 불법을 수행한다는 것도 과학문명에따른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하는 정신개벽의 불법입니다.
한마디로 물질문명을 바탕으로 하면서 진리적이고 사실적인 정신개벽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소태산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물질문명이 전제되지 않는 수행은 소태산의 개교 동기에 빗나가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