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실상에 대한 일원과학적 해석(3)
2. 동양 관점의 우주 존재 실상
1. 참의식
우리 인간의 지식 한계를 초월하는 대상을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설명하려 하는데는 '적용할 수 없는 영역'에 사용한 결과로 원인하여 발생하는 모순과 혼란을 없앨 수 없다. 우리는 통상 이러한 자리를 일러서 '신, 진리, 하느님, 태극, 법신불' 등으로 상징하고 있다. 우리들은 스스로가 불완전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명확하지 않은 개념들로부터 유추된 불확실한 추상대상을 때로는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
우리가 의미하는 모든 존재는 인간의 감각적인 인식과 사고적인 인식의 대상이기 때문에 인식도 논리적인 인식과 이성적인 인식으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의미하는 존재는 논리적인 존재이며, 이성적인 존재는 인간의 감각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대상이어야 한다. 현대과학의 관점에서 보는 존재는 오로지 에너지의 변환일 뿐이다. 모든 물질이 갖는 질량은 그 구성 입자들이 자체을 포함하는 다른 입자들과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에너지 교환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는 그 존재를 파악하려는 주체에 따라서 당연히 다르게 보여야만 하고, 또 사실 그렇게 보인다. 사람이 보는 존재, 원숭이가 보는 존재, 빛이 보는(피사체로서의 의미) 존재, 소립자(양성자, 뉴트리노 등)가 보는 존재 등은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대상에 대한 존재의 의미는 그 느끼는 감각을 초월하여 존재의 유무 조차 구분할 수가 없다. 존재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나타나 보이는 것”이지 “나타나있는것”이아니다. “ 나타나있다”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그래서 옛날 동양의 조사들께서는 이를 직관적으로 보시고 '만유가 허깨비이다'또는 '물거품이다'고 하였는지 모른다.
여러 경우에 있어서 존재의 실상은 우리(인간)들의 감각적인 선택에 따라서 서로 상반되거나 또는 상보적인 특성(빛의 입자-파동 특성)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존재는'생각'그 자체가 존재일 수 있다. '생각'은 대상이 추상적이든 현상적이든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그 움직임은 곧 시간이며, 시간은 그 자체가 존재이다. 다만 영상화된 형태들이 임의의 연속성이나 안정성을 가질 때 그것은 '물체'가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현상적인 존재(고정된 형상), 피상적인 존재(변하는 형상 ; 구름, 바람 등), 가상적인 존재(극락, 천국 등)로 구분 지어진다고 할 수 있다. 존재는 유상(有相) 뿐만이 아니라 무상(無相)도 포함하며, 유정(有情) 뿐만이 아니라 무정(無情)도 포함하므로 영기질을 존재라 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로 보아 우리 인간의 의식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참의식이란 우주의 절대자리(진리)와 합일한 내재된 성품이다.
2. 기성과학의존재론
- 서양의존재론
서양의 종교는 증거 없이 대상을 인정하는 특성이 있는 반면에, 서양의 과학은 반드시 증거가 제시되어야 인증을 받는다. 서양의 자연과학 성립은 물질이 기본원소로 이루어지고, 독자적이며, 불변하는 절대적 성질을 가지며 물질간의 결합이나 작용에 있어서도 일정한 법칙에 따라서 그 결과가 예측 가능한 인과율에 의하여 결정되는 데에 기초를 두는 것이다.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 자연계의 모든 이론이나 원리는 일관성을 가져야 하며, 일관성은 개연성 상호 독립성-상호 연관성, 절대성-상대성 등으로 확대 또는 대치된다. 고전물리학은 현대물리학의 거시적인 범위로 제한된 표현이다. 뉴턴역학을 비롯한 고전물리학은 다분히 확정적이다. 즉, 임의의 현상은 그 초기 조건이 정확하게 주어지면 관련된 수식에 의하여 그 결과가 정확하게 구하여 진다. 분명한 인과율에 따라서 그 존재가 확정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미시세계를 주요 관점으로 보는 양자물리학을 비롯한 현대물리학은 다분히 미 확정적이다.
개체의 특성을 확정적으로 다루기보다는 개체의 양상을 통계적으로 결정 짓는다. 현대물리학의 인과율은 미 확정적 인과율이라 할 수 있다. 고전물리학의 확정적 인과율은 동양 불교사상의 인과율과 같고, 현대물리학의 미 확정적 인과율은 원불교의 인과율과 비슷해 보이나 그 뜻하는 바는 사뭇 다르다.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정성원리는 피 관측물에 대한 관측자의 상대적인 불확정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동양사상에서 유무(있고, 없음)의 불확정성은 동질성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으로 그 의미 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동양사상은 통계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이다.
일원과학 관점에서의 인과율은 원인에 근거한 결과에 국한하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전기(轉機)를 마련하는 특성을 갖는다. 이점이 서양사상에 근거한 인과율과 근본적으로 다른 양상이다.
서양의 철학과 종교에서 보는 존재실상도 물질에만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은 존재의 실상에 대한 의구심을, 생각하는 자체를 근거로 하여'있음'이 사실임을 증명하며, 종교는 존재의 원천을 추구하여 종국에 가서는 정신(믿음)에 의한 물체의 존재를 확신하게 된다. 현재까지 서양의 자연과학은 인간의 정신과 물질을 완전히 분리시키고 있으므로 정신의 작용에 의한 표현은 설명될 수 없으며, 자연의 물질적인 현상만을 부분적으로 관찰하기 때문에 전반적인 존재 개념의 관점을 가질 수는 없다.
- 동양의존재론
동양의 관(觀)은 마음을 정숙하게 하여 청정한 경지에서 존재의 실상을 객관적인 사실 그대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만물을 관하여 보면 자신과 타인이 하나임을 알게 되고, 자신과 자연이 하나임을 알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만유가 일체임을 증득하게 된다고 한다. 사물은 차별되어 나타난 그대로가 평등한 존재이고, 평등한 그대로가 차별(역할)로 나타난 현상이다. 색(色)은 색 그대로가 공(空)이고, 공은 공 그대로가 색이다. 공은 존재의 상대적인 없음이다. 절대로 없는 자리가 아니다.
'있음'을 내재하는 빈자리인 것이다. 공은 존재의 부정이다. 지금 여기에 '있음'은 시간과 공간을 함축하여 과거를 머금고, 미래를 일구어 가는 현상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적인 실체성이 없고, 다만 본질성과 대상과의 차이로 감지된다. 천지만물은 어느 것 하나 나를 위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천지만물이 어느 것 하나 나와 상관성을 갖지 않은 것이 없다. 곧 보는 것이 내 것이고(나의 삶의 일부이고), 생각하는 것이 모두가 내 것(나에게 영향을 준다)이다. 천지만물이 어느 것 하나 진리의 표현 아님이 없고, 천지만물이 어느것 하나 책임과 용도가 없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자연의 순리에 따른 사물의 쓰임과 행동을 유념(留念)하여야 한다는 것이 동양의 존재론이다.
우주의 질서와 자연의 순환은 양의 기운이고, 온갖 사회의 모순과 혼돈은 음의 기운이다. 이들 음양의 불균형한 모든 것이 대상을 성숙시키고, 나가서는 정화시키는 역과정(逆過程; 전쟁, 천재, 전염병 등)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선각자는 이를 깨닫고 바르게 행동하도록 가르쳤다. 옛날 우리의 스승들은, “다시 생각하라. 이미 구하는 것이 너에게 있다”고 가르친다. 이는 서양에서 가르치는, “ 구하라. 그러면얻을것이다”또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보다는 동양의 덕(德)이 갊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