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이 간다┃요미탄촌과 치비치리가마 그리고 시무쿠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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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울안이 간다┃요미탄촌과 치비치리가마 그리고 시무쿠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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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25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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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양국의 종교·시민사회 활동 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평화를 연구하는 씰(SEAL : 동아시 아 리더십 스쿨(school for east asia leadership))이 올 해는 일본 오키나와에‘종교 인이 만드는 평화 - 군사주의 와 민족주의를 넘어서’를 주 제로 2월 7일 부터 11일까지 5일간의 일정으로 답사를 다 녀왔다. (편집자 주)

4면-오키나와.jpg

# 미군 상륙의 땅'요미탄 마을'
1945년 4월 1일 미군이 오키나와 섬 서쪽 해안에 상륙하자, 주민들은 가마(동굴)와 귀갑무덤(龜甲塚)에 몸을 숨겼다. 요미탄촌 나미히라구(波平區) 주민의 대부분은 마을의 치비치리가마(사진 위)와 시무쿠가마로 나누어 대피했다. 치비치리가마에서는 주민의 '떼죽음'이 일어난 반면 시무쿠가마에서는 이런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과연 '삶'과 '죽음'을 나눈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미군이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면 무자비하게 도륙(屠戮)할 것이라고 알려줬기에 치비치리가마로 피신해 공포에 떨던 주민들은 오키나와 상륙 다음날 4월 2일 지면으로 차마 다 옮길 수 없을 만큼 서로를 죽고 죽이는 처참한 '집단자결'이라는 지옥도를 연출했다. 당시 치비치리가마로 피신한 인원은 140여명 그 가운데 83명이 죽창과 독약으로 목숨을 잃었다.


반면에 시무쿠가마에는 무려 천 명이 넘는 인원이 피신 중이였지만 한 명도 목숨을 잃지 않고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기적의 한 가운데에는 히가 헤이지와 히가 헤이조라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젊은 시절 하와이에서 유학을 하고, 퇴직하면서 노년을 오키나와에서 보내기 위해 왔던 그들은 자신들의 집과 재산을 일본군에게 몰수당한 상황에서도 집단자결에 내몰린 주민들을 설득했다.


“우리는 미국에서 살았기에 미군을 알고 있다. 그들을 설득하면 우리는 모두 죽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다. 아까운 목숨을 함부로 버려서는 안 된다. 자랑스러운 죽음(흔히 옥쇄(玉碎)라는 말로 미화된)이란 없다”


오키나와 현지인으로 영어에 능통했던 두 사람은 집단주의적 세뇌에 빠진 천 명의 목숨을 구해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은 '구명동굴(求命洞窟)의 비(碑)'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있다(사진 아래). 이처럼 눈 밝은 지도자의 역할은 어느 시대, 어느 상황을 막론하고 소중하기만 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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