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 종교, 민족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는 자(1951년 UN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 (이하 난민협약) 제1조 난민 규정)”
우리말 '난민(難民)'은 영어 refugee의 번역어다. refugee는 '뒤로/반대로(re)' '도망하다/쫓겨나다(fuge)'를 의미하는 라틴어 refugio에서 온 말이다. '반대편으로 쫓겨난 사람'이다. 그에 가장 가까운 우리말은 '피난민(避難民)'이다. 전쟁을 경험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언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난민(難民)'이라는 애매한 한자어를 사용하고있다. '재난을 피해온 사람'이라는 말에서 '피한다'(避)는 동사를쏙빼고나니, '난민'은 그 자체로는 알기 어려운 낱말이 되어버렸다. 그러는 사이 한국인에게 난민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과는 전혀 무관한, 그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위험한 외국인'이라는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피난의 원인과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는 분위기도 커져가고 있다.
난민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나 민족 단위의 재난(전쟁, 분쟁)이 가져다준 결과이고, 정치적 폭력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난민협약도 세계대전 이후 자국을 떠날 수밖에 없는 피난민들이 대거 발생하자 이들을 국제적으로 보호하자는 취지로 제정되었다. 피난의 원인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기아로 도무지 살 수 없어서 좀 더 안전한 지대를 찾아 떠나는 경제적 이주민도 있지만, 그 성격이야 어떻든, 핵심은 피난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물을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국민국가 체제 하에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국경'을 강화하면서 (피)난민이 타 지역이나 국가에서 살아가기는 훨씬 어려워졌다. 근본 원인은 국가나 사회가 제공해놓고, 그 책임은 약한 개인이 떠맡고 있다. '너희 때문에 우리도 힘들다'며 아예 자기 나라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막으려는 흐름도 커지고 있다. 2015년 가을 터키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던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사진을 보며 안쓰러워하다가도, 정작 난민이 자국의 문제가 된다 싶으면 행여나 손해라도 볼세라 외면해버리곤 한다. 한국은 다소 예외려나 싶었는데, 이번에 제주에 들어온 예맨 난민들을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한국인의 53.4%가 난민을 반대한다는 7월 4일자 리얼미터 여론 조사도 있었다.
왜 그런 것일까. 부모와 헤어질까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는 멕시코 이민자 아이 사진을 보며 미국의 비인간적 이주민 정책을 비판하면서도, 제주에 들어온 예맨 난민 또는 이주민에 대해서는 딱 잘라 배타한다. 한국인 전쟁 포로가 타국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살아온 이야기에는 마음 아파하다가, 한국으로 오려는 난민에 대해서는 마음 의빗장을걸어잠근다. '고려인'을 억압한 옛 소련에 대해서는 분노하다가, 예맨 난민은 그저 돈을 찾아온 가난한 나라 사람이라는 소문을 확산시키며 인종차별주의적 분위기도 만들어낸다. 이들 가운데 IS 대원이 섞여 있을지 어떻게 아느냐며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하기도 한다.
보수 기독교인은 근거 없는 '이슬람 포비아'로 무슬림 난민을 잠재적 성폭행범이나 극단적 근본주의자 취급을 하면서 본국으로 송환하라 목청을 높이기도 한다. 노예처럼 살던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자유를 찾아 피난했던 기록을 경전(구약성경)으로 삼으면서도 정작 난민 문제에는 관심이 없거나 자기 감정을 기준으로 배타한다. 예수가 헤로데의 살인적 폭정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했었다는 성경의 기록은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외면한다. 그러면서 '난민 반대'라는 여론을 만들어간다. 종교도 개인의 편의에 따라 선택적으로만 수용하는 편협한 '자기신앙'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는 난민보호법이 있다. 세계대전을 겪은 뒤 1951년 유엔에서 난민 지위에 관한 협약(Conventionan Relating to he Statues of Refugees)이 발효되었고, 이 난민협약을 토대로 1967년에는 난민 의정서(Protocol Relating to the Statues of Refugees)가 체결되었다. 2차 대전 이후에도 난민이 계속 발생하고 성격도 다양해지면서 난민의 범위를 현실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난민협약이든 난민의정서든 그 핵심은 모든 난민을 차별 없이 보호해야 한다, 난민 신청자를 강제 송환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난민은 보호국에 대한 의무를 져야 한다. 한국은 이러한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에 따라 1992년 12월에 국제적 난민보호국의 대열에 동참했다. 법무부 산하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난민규정을 신설한 뒤 2012년 입법 발효 했고, 2013년부터 시행 중이다. 이 마당에 난민을 무작정 거부하거나 강제로 송환하는 것은 국내법은 물론 난민협약과 난민의정서에 위배되며, 국제적으로도 비난받을 일이다. 정말 난민인지 아닌지 잘 가리고, 난민이라면 더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할 의무만 남아있는 것이다. 단순히 여론으로 처리할 문제는 아니다.
정치적인 결단과 행정적 뒷받침이 강화되어야 한다. 사람이 먼저인 나라를 내세웠던 문재인 정부는 권리의 주체를 '국민'이 아니라 '사람'으로 바꾸고자 했던 청와대 헌법 개정안의 정신대로 난민심사위원과 잠정 수용시설을 대폭 늘려야 한다. 1951년 직원 34명, 예산 30만 달러로 출범했던 유엔난민기구(UNHCR)가 2017년에는 직원 1만 966명, 예산은 77억 달러(8조 6천억원)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확대되어왔다. 그 돈으로 6,560만여 명의 난민을 돌본다. 난민이 그 정도로 많다. 그런데 겨우 몇 백 명의 난민을 대번에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라는 강퍅한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심사해서 피치 못할 난민으로 판명되면 응당 한국에서 좀 더 안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 물론 현행 난민협약이나 난민법상 불가피한 정치적 난민인지 단순한 경제적 이주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 그럴수록 심사위원과 방식을 다양하게 확대하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그 과정에 애매모호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가능한 한 보호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것이 난민을 인종이나 종교나 출신국에 따라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난민협약이나 난민의정서 그리고 난민법의 정신을 구체화하는 길이다. 난민을 가려내고 보호하는 과정이나 절차가 인권을 기준으로 진행되어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저 돈의 논리로 처리하거나, 일종의 인종차별주의 혹은 알량한 문화적 우월주의가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된다.
삼한시대에는 일종의 제의 장소인 소도(蘇塗)가 있었다. 신성한 공간이어서 심지어는 도둑이 들어와도 잡지 않았다. 아니 잡을 수 없었다. 범죄자조차 단죄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비록 그런 신성함 같은 것은 다 깨져버린 시대이기는 하지만, 전쟁 통에 살기 어려워 낯설디 낯선 곳으로 목숨 걸고 온 난민을 내쫓으라고 청원하는 이가 더 많다니, 슬프다. 설령 그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온 이주민이라 해도 그렇다. 가능한 한 같이 살면서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궁리를 좀 더 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3만명 이상의 탈북자들과 함께 살면서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어쩌다 그렇게 옹색하고 비인간적인 지경으로 몰려가게 되었을까. 우리가 피난하던 시절, 피난민 가족이 천만 명에 이르던 시절이 불과 반세기 조금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