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는 교정원이 새롭게 구성됨에 따라 곧 전무출신들의 대대적인 정기인사가 단행될 예정이다. 인사는 '전무출신인사임면규정'과 '전무출신인사임면시행규칙'을 기준으로 진행되며 지자본위의 원칙과 그 대상자의 처지를 따라 이동·유임·휴양·휴무·대기 등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시기에 누구나 한 번쯤 “나는 과연 어디로 가게 될까?” 걱정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중용』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군자는 현재의 위치에 따라 행하며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재물이 있고 명예가 있으면 그것에 맞게 처신하고, 혹 가난하고 천한 입장이면 그런 입장에서 처신하며, 혹 변방 나라에 처하면 또한 그렇게 처신하고, 환난을 당하면 그러한 입장에서 행동하나니, 군자는 어떠한 처지에 들든지 그 자리에서 편안함을 얻지 않음이 없다.”(『중용』제14장: 君子는 素其位而行이요 不願乎其外니라. 素富貴하얀 行乎富貴하며 素貧賤하얀 行乎貧賤하며 素夷狄하얀 行乎夷狄하며 素患難하얀 行乎患難이니 君子는 無入而不自得焉이니라.)
총회 때, 정산종사의 장녀 영봉이 산촌(山村)교당 교무로 인사가 결정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당시 농촌이나 어촌 교당 등 낮은 곳으로 발령받은 교무들도 밝은 표정과 가벼운 발걸음으로 임지를 향하여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정산종사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사로움이 없이 공의에 따라 인사를 한 것도 중요하지만, 영봉이 그에 순응한 것 역시 교단의 대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영봉은 왜 임지의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그렇게 어디든 가볍게 떠날 수 있었던 것 일까?
어느 날 신임교무가 대산종사를 찾아와서 지방에 나가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물어보았다. 그 교무는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공부했는지, 지방에 나가 어떻게 가르칠지 막막할 뿐이라고 호소한다. 이에 대산종사는 다음과 같이 문답한다. “정기훈련 11과목과 상시응용주의 6조목을 아느냐?” “예,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당에 나가서 그것은 할 수 있겠느냐?” “예” “그러면 됐다. 그렇게 하라.” “이제 자신 있습니다.”
우리는 대종사의 이 훈련법으로 힘을 얻어야 앞으로의 공부와 교화가 쉬지 않게 될 것이다. 대종사는 대자대비의 경륜을 담아 아주 쉽게 훈련법을 밝혀주었기 때문에 어쩌면 새 시대 주세불로서의 책임을 다 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실지훈련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에 대산종사는 이를 참으로 조심하라고 크게 경계하며, 이 훈련법으로 십년 정도만 꾸준히 노력하면 용솟음치는 기쁨을 맛볼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중용』에서 군자는 어떠한 처지에 들든지 그 자리에서 자득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씀은 곧 이러한 경지와 상통하는 것이며, 실지훈련을 통한 실력을 얻게 된다면 내가 가는 곳이 화려한 도시이든 궁핍한 농촌이든 그 처지에 상관없이 그 자리에서 편안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영봉이 어디든 가볍게 떠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곳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 있다. 물론 인사에 관계되는 의논은 정산종사의 당부대로 기관 기관이 서로 양보하고 사람사람이 서로 대의를 잡아 적재적소로 마땅하게 배치하되, 의견이 끝내 상대되는 때에는 양방의 의견을 난만히 들어 본 후 다수의 의견에 복종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인사를 받는 사람들은 어디를 가든지 전산종법사가 취임사에 말씀한 바와 같이 대종사의 위대한 경륜인 교화단과 훈련법을 통해 나를 새롭게 하고, 교단을 새롭게 하며, 세상을 새롭게 하는 한 해로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어딜 가든, 내가 가는 그곳에 일원화(一圓花) 꽃피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