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의 무덤이 있는 영대(靈臺) 내부. 증산의 외동딸인 강순임이 설립한 증산법종교 본부에 증산과 부인 정치순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한 영대를 1952년 고전식 목조건물로 지었다. 증산법종교 본부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어 건물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증산의 천지공사는 신명계의 한을 풀어내려는 씻김굿이자 일종의 푸닥거리였다. 각설이타령처럼 한없이 낮은 곳의 사람들의, 그 사무치는 원한을 풀어주려는 노래였던 것이다. 천지공사를 시작한 지 9년 만에 증산은 자신이 가르침을 펼치던 장소에서, 제자 김형렬의 품에 안겨, '태을주(太乙呪)' 주문을 외우면서 세상을 떠났다. 1909년 양력 8월9일 오전 11시 무렵이다.
증산은 그 어떤 종교적 시스템도 남기지 않았다. 증산의 제자들은 그 뜻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정통제자임을 내세우기 위해 증산의 유해를 함부로 훼손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증산의 목침을 가져다가 정통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증산이 삶을 마감한 1909년은 조선이 식민지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1년 전이었으니, 그 땅에 사는 생명붙이들의 절망과 상처 또한 깊을 대로 깊었다. 시절이 그러하니 증산의 유해를 훔쳐다 새로운 종교를 창설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증산의 파생종교는 오늘날 126개에 이른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증산의 유해는 딸에 의해 수습되었다. 딸은 구릿골 동곡약방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증산법종교 본부 영대(靈臺)에 증산 부부의 유해를 안치했다. 영대는 금평저수지(오리알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지어진 한옥식 목조건물이다. 중앙 제단을 중심으로 각각 양옆에 무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유해를 훼손하거나 훔쳐가지 못하도록 속은 시멘트로 봉했고 겉은 화강암으로 장식했다.
호기심을 갖고 무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면서도 나는 줄곧 증산의 삶을 더듬고 그가 펼치고자 했던 세상을 상상하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돌덩이에만 마음이 쏠렸다.
'과연 증산의 유해가 이 안에 있기는 할까?'
'사람들이 무덤을 파헤쳐 유해를 훼손하고 가져갔다는데… 왜?'
'무엇이 두려워 이렇게까지 돌무덤으로 만들었을까?'
한참 동안 그런 허상을 좇은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증산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곰곰 생각해 봤다. 증산은 생전에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다. 현재 전하는 그의 유일한 친필저작이라는 <현무경(玄武經)>도 원본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증산은 꿈을 남겼다. 절망에 목놓아 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마음을 다하면 하늘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운 것이다. 세상은 서로 다투는 곳이 아니라 함께 사는 상생의 터이다. 이것이야말로 증산이 열어주려 한 세상의 모습이었다. 그 꿈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빛이 바래지 않고 있다. 증산은 꿈에서 왔고 꿈으로 돌아갔다.
사실 그동안 증산에 대한 나의 시선은 종교적 숭배의 그늘에 가려져서 역사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매우 미흡했다. 인물로서 제대로 조명하지도 못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연구 성과도 극히 미약했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라.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
증산은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했다. 혹세무민하지 말라 가르쳤고, 병든 것을 낫게 하려고 애쓰던 삶이었다. 그의 삶은 아주 짧았다. 하지만 구한말 절망의 땅, 조선에서 태어나 격동의 시대를 이겨내며 인류에 대한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한 인간 강증산의 삶과 사상은 긴 세월 동안 우리 곁에서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그는 죽었으나 죽지 않았다.
천지은 교도(원불교출판사 편집장, 남중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