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배우는 이유가 작자의 마음결을 따라 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논어>는 공자의 마음결을 닮아가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성인의 마음결을 닮아가는 것이란 마음의 원리를 알고 그 원리에 따라 마음을 잘 지키고 사용하는 것이 요체이다.
이 세상 모든 일 가운데 역리(逆理)로 되는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을 것이다. 이는 마음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말해 마음공부는 철저히 합리적인 수행, 마음의 속성에 근거한 수행이라야 한다. 여기에 근거하지 않는 무조건 수행, 일방적 수행은 결국 허망한 결과를 초래하거나 또는 편수(偏修)가 되어 원만한 인격을 이루지 못하고 조각 인격으로 굳어지고 만다. 그렇다면 그 마음의 원리란 무엇이고 그에 따른 마음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성균관대학교 신정근 교수는 <마음과 철학>(유학편)이라는 저서에서 공자가 드러내고자 했던 마음의 상태를 ‘흰 마음’과 ‘검은 마음’으로 구별하여 논한다. 그에 따르면 <논어>에서 군자의 마음은 투명하고 주위와 끊임없이 교류하여 개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하얀 색으로 그 마음의 특성을 상징할 수 있다. 공자는 사람이 군자의 흰 마음을 추구하기를 요구했으므로 이것이 공자의 마음에 대한 관점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한편 <논어>에는 군자의 흰 마음뿐만 아니라 소인의 검은 마음도 들어 있다. 검은 마음은 자신과 주위 사람을 철저하게 분리하고 자신의 이해와 욕망을 가장 우선시하며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최선의 방법을 입안하고 주도면밀하게 실천해 나간다. 공자는 검은 마음의 사람이 많아진다면 공동체가 타락하고 부패한다고 보았기에 그들은 수양과 감화를 통해서 변화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이처럼 공자는 수양을 통해 흰 마음을 키우고 검은 마음을 줄여야 한다는 마음 이론을 형성하는데 초석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흰 마음을 키우고 검은 마음을 줄이는 마음의 원리와 방법에 대해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지 못한 부분이 있다.
좌산상사는 <마음수업>이라는 저서에서 마음의 속성에는 무한한 다양성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 모두를 종합하여 두 가지 맥락으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씀하며 그것을 ‘체(體)’와 ‘용(用)’으로 밝혔다. 다시 말하면 체성의 속성과 작용의 속성이다. 이 체성의 속성을 진공(眞空)이라 하고 작용의 속성을 묘유(妙有)라고도 한다. 진공이란 모든 것들이 텅 비어 있는 상태를 말하고, 묘유란 기기묘묘(奇奇妙妙)하여 모든 것이 다 갖춰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마음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진공과 묘유의 원리에 따라 합리적으로 하는 것일까? 이를 함축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마음속에 텅 비우고 없애야 할 방향[비움]과 모두 갖춰 있게 해야 할 방향[채움]으로 정리할 수 있다. 현실 있는 데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갖추고 장만하지만 거기에 집착상(執着相)을 다 놓아버리고 본심으로 돌아가 안주하는 것이 비움의 길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초연히 유유자적하다가 기틀 따라 있는 곳에 나타나 종횡무진(縱橫無盡)하는 경륜을 다듬고 펼치는 것을 채움의 길이라 한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이 갖추고 있는 두 가지 맥락이며 마음공부의 길이라 할 수 있다.
공자 마음공부의 핵심 중에 하나인 극기복례(克己復禮)만 하더라도 자신의 욕심을 이기는 극기는 진공묘유 그 가운데 진공으로 주체를 삼은 공부라야 참다운 극기가 되는 것이며, 예의범절에 합일하는 복례는 진공묘유 그 가운데 묘유로 주체를 삼은 공부라야 참다운 복례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인들은 다만 시대의 인심과 지역에 따라 교화방편으로써 다르게 표현하고 부족하게 밝힌 부분이 있었을 뿐, 결국 하나의 진리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었던 것이리라.
“진공으로 체를 삼아 검은 마음 줄여가고, 묘유로 용을 삼아 흰 마음 키워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