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신문=우형옥 기자] 빠알간 조끼, 새하얀 머리에 곱게 꽂은 검정 실핀. 꽃무늬 지팡이를 짚은 그가 법당에 들어왔다. 굽은 허리에 아픈 무릎을 이끌고 한 발짝 한 발짝 법당의 제일 앞으로 나아간다. 그 뒤에 앉아 함께 법회를 보니 불안했던 걸음과 달리 독경을 외고 성가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참 까랑까랑하다. 법회를 마치고 단회 장소로 가는 그 짧은 걸음도 흔들릴지언정 참으로 단단하다. “교당 생활을 하는 게 참 기뻐요. 성가 부르고 기도하고 독경하고… 전부 기뻐요.” 때마침 법당에 울려 퍼지는 성가 131장의 가사 ‘고통이 변해서 기쁨이 되도록 감사의 기도 속에 살게 하소서’가 마음에 와닿는다. 91세의 나이에도 항상 교당에 나와 기도를 하는 죽전교당 열타원 박재화 교도를 만나고 왔다.
돌고 돌아 다시 만나다.
그는 부산 사람이다. 남부민동에 살았던 그는 아주 어렸을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작은 증조부 집 앞 ‘불법연구회’라는 나무 간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어렸을 때라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30이 넘어 입교를 했지만 그마저도 남편을 따라 서울에 올라오니 자식 키우랴 집안일 하랴 교당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애들을 다 키우고 다시 김해로 내려가니 그때가 50대 중반. 그는 뒤늦게 교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교당에서 1년에 한 번씩 익산 성지로 훈련을 갔어요. 교무님이 반백년기념관에 뭐 사진이 전시돼 있다고 그래서 구경을 했어요. 그런데 벽에 우리 작은 증조부, 소산 박허주 할아버지하고 할머니, 대종사님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 거라. 어찌 반가운지. 그때 비로소 알았어요. ‘아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원불교에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셨구나. 내가 보았던 그 범상치 않으셨던 어른이 대종사님이셨구나. 이렇게 깊은 인연이 있었는데 돌고 돌아 이제야 왔구나’ 하고요.”
대종사를 뵌 적이 있는지 물으니 그는 당장 어제의 일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다른 건 다 잊어버려도 이건 잊을 수 없어. 8살 때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없는 거라. 그래서 작은 증조부네 집 앞에 혜실(법당)에 가보니 댓돌 밑에 하얀 고무신 여러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어요. 그래서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 다 거 계신가 보다’ 하고 들어갔어. 엄청 조용해요. 그래서 호기심에 방에 들어가니 어른들이 하얀 옷을 입고 쫙 앉아 계시는데 제일 앞쪽에 어떤 어른이 얼굴에 윤이 나고, 뒤에 후광이 비쳐요. 동그랗고 검은 안경을 꼈는데 눈에서 광이 나요. 눈이 부셔요. 내가 너무 놀라서 어린 마음에도 보통 분이 아니라는 걸 느꼈죠. 그래서 소리도 없이 살살 나갔어요. 그땐 몰랐는데 반백년기념관에서 그 사진을 딱 보니 그분이 대종사님이었던 거죠.”
깜빡깜빡, 많은 것을 잊어버렸지만 대종사를 만났던 그날은 참으로 생생하다는 그이다. 아마도 그때의 기억이 그를 다시 교당으로 오게 한 것은 아닐까? 참 신기할 따름이다.
감사하는 마음
그렇게 김해교당에서 봉공회며 여성회며 교도회장까지, 교당 일이라면 두 팔을 걷어붙이며 산 지 오래였다. 그러나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고 하던가. 나이가 들고 몸이 아프니 혼자 있기가 벅찼다. 그렇게 6년 전 김해를 떠나 자녀들의 집과 가까운 죽전으로 올라왔다. 타지에서 혼자 교당을 다니려니 막막했지만, 죽전교당 교도들이 항상 함께해줬다. 그가 매주 교당에 나올 수 있는 것도 다 죽전교당 교도들 덕분이라고. 그는 챙겨주는 법동지들에 미안하고도 감사한 마음을 표할 길이 없어 하루에도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가뿐하게 떠나길
그는 나에게 힘든 일은 남도 힘들고 나에게 좋은 일은 남에게도 좋다며 경계가 드는 마음을 잡기 위해 하루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영주나 염불을 외우며 마음을 다잡는다. 남은 생의 목표를 ‘물들지 않는 마음’이라고 전한 그는 중용을 지키며 살고 싶다고 한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정(情)에 떠내려가지 않게 말이다.
“내 마지막 기도는 사람들 애 안 먹이고 가뿐하게 떠나는 겁니다. 그러고 다음 생에는 사회와 교당에 좀 더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태어날래요.”
“우주의 진리는 원래 생멸이 없이 길이 길이 돌고 도는지라.” 오늘도 그는 <대종경> 인과품 1장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간다.
12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