橫看成嶺側成峰 遠近高低各不同 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 (蘇東坡、題西林壁)
가로로 보면 고개요, 옆에서 보면 봉우리 / 멀리 가까이 높고 낮음이 각각 다르네 / 여산(廬山)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 몸이 산 속에 묻혀있기 때문일세.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 참 많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선 날마다 새로 나온 물건들을 광고하는데, 마치 없으면 생활에 큰 불편이나 있을 것처럼 광고합니다. 하지만 전혀 광고하지 않는 것 중에 진짜로 우리에게 소중한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꼽아본다면 아마 수백 가지도 넘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디 가서 1년 동안 사는데 필요한 것들만 챙긴다고 하면 그 가짓수가 크게 줄고, 한 달이나 일주일 정도라면 꼭 필요한 것들이 더욱 줄어들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물건들은 정작 우리가 없어선 살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것들은 대개가 값비싼 사치품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얻기 위해서 한평생을 쉬지 않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 가서도 일생을 한 번 더 살 것처럼 여기에 애착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도 삶이 종지부를 찍으면 그만입니다. 흡사 목숨처럼 아끼던 것도 하루아침에 티끌이 됩니다.
앞서 소개한 소동파의 시는 여산 속에 들어 앉아있으면 여산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밖으로 가서 멀리 보아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서정시인 듯하지만 실은 사람의 마음을 깨우치는 시입니다.
바깥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멀리서 보아야 비로소 그 실상을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눈앞에선 보이지 않는데 멀리 떨어져서 보면 잘 보이는 것 가운데 대표적으로 인과(因果)의 현상이 있습니다. 당장 손을 뻗으면 이득이 분명한데도 멀리 내다보면 반드시 크게 손해를 보는 것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힘들어할 때 영리하게 남몰래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눈이 밝은 것이 아니라 실은 앞을 잘 못 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물의 본래 모습을 정확하게 보고자 하면 성품의 지혜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으로 보면 멀고 가까움에 관계없이 언제나 잘 보입니다. 좋고 나쁨도, 귀하고 천함도, 선도 악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성품의 지혜광명은 언제나 대상에 맞추어 ‘앎’이 저절로 밝습니다. 누구나 착(着) 없이 거울처럼 비추는 이 본래의 지혜광명을 갖추고 있습니다.
올바른 수행자는 눈앞의 대상에 상(相)을 일으키지 않고, 안팎이 투명한 마음으로 이 자성의 광명을 나투어 씁니다. 본디 이렇게 하는 것을 솔성(率性)이라고 하고, 삼학병진의 공부(무시선법)라고 합니다. 원불교 수행의 정수(精髓)는 이 삼학병진 수행입니다.
세상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서 지금 이 순간도 진급·강급하는 중생들로 잠시도 고요하지 않습니다. 삼계(三界)는 거친 바다와 같아, 수많은 사람이 쉴새 없이 파도를 타고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물속으로 가라앉고, 또 누군가는 위로 솟아오릅니다. 참된 이치를 모르는 중생은 날마다 이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3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