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고통은 혼자 방에 머물 줄 모르는 데서 온다”라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1662)의 인간 내적 현실에 대한 통찰이 깊게 공명 되는 요즈음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로 인한 지구촌 대난으로 전쟁보다 참혹한 인명피해와 고통을 겪고 있다. 미국에서도 외출자제와 사회적 거리두기, 교육·종교는 물론 사회활동 전반에 모임이 정지된 지 오래다.
코로나19가 하루아침에 앞만 보고 맹렬히 달려가던 현대인의 일상생활의 흐름을 단절시켰다. 어느 시대보다도 활동적이고 대중매체와 인터넷으로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자신과의 교감이 소원했던 인류에게는 뜻밖의 충격이다. 생사가 갈리고 삶의 불확실성을 직면하면서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을 경험한다. 이는 엄청난 변화이고 경험이다.
나아가 그동안 우리가 딛고 살아온 가치관과 생활양식 전반에 시스템이 재정비되고 재배열돼야 한다는 목소리에 인류가 주목하고 있다. 개인으로나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격리된 채 조용히 지내면서 각성과 자각의 의식 토양을 배양하는 희망의 기회다.
사실 이러한 장기화된 사회적 거리두기와 격리, 재택근무 상황은 수행자나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작업이 아니고서는 평소에 쉽게 경험하지 못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전 지구적 동면의 색다른 생활환경과 존재 양식은 인류에게 조급한 일상의 흐름을 늦추고 불편과 불안, 두려움과 다급함, 답답함과 외로움, 우울 때로는 여유로움을 경험케 한다. 어쩌면 이러한 시간이 꼭 필요했음에도 늘 놓치고 살았는지 모른다. 자신의 의지로는 도저히 삶에 브레이크를 걸 수 없었던 흐름을 코로나로 급브레이크를 밟게 된 형국이다.
이때에 우리 내면을 점검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홀로 고요히 머물면서 내면의 힘을 확인하는 시간을 갖자. 시간과 공간의 한계가 무너진 고요, 생생한 의식으로만 존재하는 그 고요함으로 자신의 내적역량을 발효시키는 시간을 갖자.
일이 줄어든다고 마음이 당장 고요해지고 명백해지는 건 아니다. 코로나가 육신의 평정을 보장해 줄 순 있어도 나만의 영적 공간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생태적 환경변화나 육체적 심리적 환경변화를 건강하게 유지해 나갈 수 없다. 고요함에 머무른 독존의 가치에 대한 통찰이야말로 존재의 최고기술임을 알게 된다.
머지않아 우리는 다시 현관문을 활짝 열 것이고, 찬란한 태양을 맞이하며 일터로 학교로 나아갈 것이다. 하지만 전과 같지 않은 세상을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방안에서 홀로 보낸 고요한 시간의 가치, 그 수치만큼의 변화를 물리적 세상을 통해 만날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드디어 문자가 아닌 가슴의 언어로, 자연과 인간과 허공법계가 하나의 호흡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인간의 인식이 전환되어가는 요인 중에 대표적인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오랜 배움과 연습으로 생각과 감정, 언어, 행동 등이 조금씩 개선되고 원숙해지는 것이다. 이 방법은 오랜 기간 노력을 지속해야 하므로 깨달음에 도달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둘째는 예기치 못한 큰 사건이나 사고의 충격으로 오는 개인적·집단적 인식의 변화다. 이 경우는 미리 계획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식변화의 시기와 조짐을 예측할 수 없다. 예기치 못한 코로나19의 충격은 그 대가나 흔적이 크겠지만, 인류 역사에 의식성장, 새로운 문화운동, 생활양식의 변화라는 측면으로 설렘과 기대를 준다. 이왕이면 보다 본질적이고, 지속가능한 내적 충만을 이끌어내는 조화로운 패턴의 교육·종교·문화·제반 현상들로 재편성되기를 기대해 본다.
지금 홀로 조용히 머무는가? 그 고요가 약이다.
5월 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