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코로나, 종교의 전환을 묻다
한울안신문 창간 25주년 기획 특별좌담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의 길을 묻다’란 주제로 계속 이어진다. 지난달 1168호에 게재된 특별좌담Ⅰ에 이어 특별좌담Ⅱ~Ⅴ는 원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이하 원씨네)와 공동기획했다.
서양에서 영성의 바람이 불어와도 시대의 흐름에 가장 변화가 더뎠던 종교 그리고 원불교가 코로나19를 맞닥뜨리며 어떤 충격과 변화를 겪고 있는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본다. 종교는 과연 인류의 미래에 길이 될 수 있을까. 지난 5월 20일에는 두 번째 특별좌담으로 다년간 종교를 연구해온 학자들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패널에는 <종교 없이 신앙인으로 살기> 저자 방영미 작가(이하 방), 양승우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강남교회 사제(이하 양), 조성환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이하 조)이 참여했고, 사회는 원씨네 강현욱 교무가 맡았다. 정리=강법진 기자
1주_포스트 코로나, 종교의 전환을 묻다
2주_젊은교무, 코로나 이후의 교화를 고민하다
3주_재가출가 함께하는 활불공동체
4주_포스트 코로나, 원불교 개벽의 길
현재도 일부 지역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나고 있지만, 코로나19 방역으로 한국은 세계에 주목을 받았다. 그 이유는?
방=유교문화의 집단주의라고 평가하는 나라들도 있지만, 한국인의 공동체 정신과 IT 강국으로서의 위상이 K-방역을 이뤄 냈다.
양=조금 우스갯소리로 한민족의 특기이자 취미가 국난극복이라고 한다. IT 시대에 빅브라더가 가진 장점을 백분 활용했고, 지도자의 리더십도 한몫했다.
조=최근 <세계는 왜 한국을 주목하는가>(공저)라는 책을 냈다. 거기에서도 밝혔듯이 우리나라 헌법 1조가 민주공화국인데, 개인의 자유(민주)와 공동체의 중시(공화)가 절묘하게 힘을 발휘했다. 과학과 도학을 잘 융합시킨 한국인의 특기가 아닐까.
코로나19 사태로 바라본 종교의 시선은?
양=종교학을 전공한 저는 종교를 두 분류로 나눈다. 신 중심 종교와 수신 득도형 종교다. 이번 코로나19로 신 중심 종교(특히 기복신앙)의 허구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바이러스 앞에서 무력한 신의 모습을 보면서 신자들의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방=신천지 문제가 대중에게 드러나면서 개신교가 선 긋기를 했다. 마찬가지로 개신교에 문제가 생기면 천주교가 선 긋기를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 같은 그리스도 계열로 본다. 그동안 종교가 공공성을 무시하며 성장했다. 포스트 코로나가 언제 올지 모르나, 여차하면 코로나19와 계속 같이 갈 수도 있다. 그때에 고립된 종교는 사회와 멀어진다.
조=철학을 전공했고, 한국의 개벽사상을 연구하는 비종교인으로서 이번 코로나19로 종교에 대한 나쁜 시선은 없었다. 소수종교, 특정종교의 문제는 늘 있었고 재난이 있을 때마다 틈새로 터져 나온 것뿐이다. 오히려 나는 그런 부분에서 선 긋기를 한다. 예배를 강행했던 교회도 있었지만, 개신교 전체의 문제는 아니다. 기후위기 때에도 가만히 있던 불교계와 개신교가 ‘인간이 멈추니까 지구가 깨끗해졌다’며 생태문명전환을 선언했다. 종교의 역할은 오히려 이제부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정말 어려워질 이웃들에게 손을 뻗어주면 된다.
물론 일각에서는 종교가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이에 대해 방 작가는 “코로나19 사태가 이렇게 길어질지 모르고 주저한 면이 있다”고 말했고, 양 신부는 “종교는 사회적 책임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코로나19로 종교활동이 중단되면서 신자들의 신앙활동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방=우리가 살고 있는 삶 자체가 고행이고 우리가 다 수도자이다. 그러나 종교인은 교회 안팎의 삶이 완전히 구분돼 있다. 교회 안팎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 문제는 자가격리가 수시로 일어나면 우리는 일상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때에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제는 교회가 울타리를 없애고 문을 열어야 한다. 제도종교의 변화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양=이제는 성과 속을 구분하면 안된다. 언택트 사회가 되면 온라인과 가상현실에 맞춰 예배도 보게 된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50~60대 이상 어르신은 성당에 다시 나와 예배 보기를 바랐고, 20~30대 젊은 사람들은 온라인 예배가 편해서 좋다고 한다. 그래서 성공회에서는 ‘따로 또 같이’를 연구하고 있다.
조=규모를 갖춘 종교의 건물과 교단, 집단이 꼭 필요할까. 세력을 과시하는 종교는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종교연합운동과 함께 종교축소운동을 해야 한다. 축소된 종교, 무형의 종교가 생길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작아야 환영받는다.
그 두려움은 신자가 아니라 성직자에게 더 크게 와닿을 거라며, 양 신부는 제도종교에서 영성 종교로의 전환을 얘기했고, 방 작가는 원씨네가 추구하는 생명·평화·환경 이슈를 일반시민들과 잘 연결해 줄 것을 주문했다.
종교가 개인의 영성과 사회의 공익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나?
방=천주교의 예를 들자면, 개인의 영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교회의 세력 자체가 사회의 중심세력과 맞닿으려고 했던 욕망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학연, 지연, 혈연 말고 또 하나가 교회연이 있다. 대형교회에 나가 인맥을 쌓는 것이 스펙이 됐다. 시작부터 영성은 없었다. 권력이란 욕망에 사다리를 탄 교회들이 이번 기회에 개인의 영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양=개인의 영성과 사회의 공익에 영향을 안 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교 계열 중에 개신교가 한국으로 건너오면서 기업화가 됐다. 안티 댓글러들은 주 예수를 ‘(주)예수’라고 쓴다. 욕망 속에서 영성이 나올 수 없다.
사회봉사 영역에서의 종교계 활동도 무시할 수 없다.
방=그 빈틈을 활용한 곳이 신천지다. 종교의 이름이 아니라 봉사단체 이름으로 지역사회와 연대하며 악용해 왔다. 물론 좋은 사례도 있다. 하지만 제도 종교가 중산층화 되면서 위험한 길을 걷게 됐다. 외롭고 소외된 사람은 교회에 나오지 않는다. 교회에 가도 외롭기 때문이다. 궤도에서 이탈한 상태로 이뤄지는 종교의 봉사가 원래 의미와 적합한가.
양=종교가 신자들에게 걷은 헌금을 얼마나 사회에 환원할까. 부끄럽게 생각하고 반성해야 한다.
조=종교에 깊숙이 개입은 안 했지만, 한국의 개벽종교(동학·천도교·증산교·대종교·원불교)들은 보국(輔國) 종교로서 성격이 있다. 천도교가 기획한 3.1운동에 기독교가 가세한 종교연합운동은 세계종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시점 시점마다 종교의 역할이 있었다. 세월호 참사 때, 중국 언론에서 ‘한국은 종교백화점’이라 보도했다. 좋은 점이든 나쁜 점이든 한국은 종교를 빼고 설명할 수 없다. 시민들이 봉사를 많이 하는 것도 종교성이고, 나라를 위해 금을 내놓는 것도 종교성이라 본다.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에는 같이 봉사하고 격려해 주는 정서가 있다. 해외언론에서는 이런 점을 놓치고 있다.
양=한국인의 기본 심성에는 한(恨), 호국정신이 있다. 우리가 그동안 유능한 지도자를 못 만났지만, 그 한이 호국정신으로 발휘가 된다. 위기가 닥치면 기독교인, 불교인, 원불교인 할 것 없이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 뭉친다. 올림픽 때, 애국가 부르며 눈물 흘리는 것도 그렇다.
방=자기희생을 종교성으로 볼 것인지는 논의가 필요하다.
조=한국종교, 특히 개벽종교에서는 종교성과 도덕성을 크게 구별하지 않았다.
제도종교가 공공성을 담보하지 못했다면, 미래 종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나?
방=제도종교는 지금까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다. 각계각층에서 코로나 이후 종교전환을 많이 이야기한다. 비종교인은 관심이 없는데 종교계는 위기의식이 느껴질 정도로 활동한다. 이는 다른 게 아니라 기득권이 사라질 거라는 상실감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그동안 교회는 울타리를 견고하게 하고 이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만 복음, 구원을 줬다. 교회의 문을 연다는 것 자체가 기득권을 놓는 것이다. 문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종교성을 말살하지 않고 면면히 흐르는 공공성과 만날 수 있다.
양=우선순위의 문제다. 우리가 먹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가. 마찬가지로 종교가 신자를 위해 존재하는가, 신자가 종교를 위해 있는가. 지금은 신부, 목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신자들이 존재한다. 이제는 신자 중심 교회, 그들의 행복이나 영성을 위해 종교가 존재해야 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코로나가 인간에게는 바이러스지만 지구에게는 백신이라 한 것처럼, 종교계에도 치료제가 됐을 것이다.
조=한국의 코로나19 대응하면 떠오는 말이 개방성과 투명성이다. 헌금을 투명하게 하고 교회 문을 열어야 한다. 원광대학교에서 근무하며 느낀 원불교는 종교 간 간격이 가장 적다. 종교 간 대화에 가장 적극적이다. 앞으로는 종교라는 울타리도 넘어서 철학이나 과학과 같은 분야간 대화도 활발했으면 좋겠다.
방=철학의 하위 버전이 종교라 생각하는 분도 있다.
조=철학이든 종교든 원만하고 큰살림을 이루기 위한 한 부분으로 참여한다고 보고 싶다. 종교는 철학에서 다루지 않는 영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상호보완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원불교에서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말한다. 과학문명을 성찰하여 정신개벽을 하자는 일종의 ‘성찰적 근대화’론이다.
방=십일조 헌금의 투명성도 그렇지만 원불교 여성교무의 복장도 열어야 한다.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복장이 아니다. 시대에 맞게 보편성을 갖춰야 젊은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양=이곳 원불교소태산기념관도 그렇고 원불교 건물이 기와집이 아니라 최첨단(?) 건물이라는 것에 놀랐다. 제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코로나19가 제도종교의 변화를 앞당겼지만 기존종교가 가진 희망도 있을 것이다.
방=천주교 우리신학연구소에서 성직자, 신자를 대상으로 코로나19 이후에 무엇을 원하는지 설문조사를 했다. 오프라인 미사 중단이란 교회의 결정에 신자들이 높은 지지를 보냈다. 반면 사제가 코로나 시국에 한 일이 없다는 불만도 제기됐다. 천주교 같은 중앙직권체제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일사분란한 대처를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직 가능성이 있다면 우리나라가 상당히 회복 탄력성이 높다는 것이다. 위기가 오면 각계각층에서 연구를 한다. 이때 평소 위기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목소리를 낸다. 그 다양한 목소리를 집단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사실 그동안은 기존 시스템에 의해 문제없이 잘 굴러갔다. 잘 요구하지도 않았고, 요구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간단계에서 제안서가 많이 사라졌다.
양=수요가 공급을 낳는다고 하지만 공급이 수요를 내기도 한다. 지금은 제도 종교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 시대에 맞는 종교의 역할이 뭔지 아직 답을 내놓은 종교가 없다.
조=온라인 예배는 대학의 온라인 강의와 상황이 비슷하다. 온라인 강의를 하니 민낯이 다 드러난다. 수요자의 요구도 다 들어줘야 한다. 종교도 사람들의 수요에 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 지금은 생태학이 화두이다. 원광대학교병원에서 ‘제생의세’라는 표현을 쓰는데 “중생을 구제하고 세상을 치료한다”는 뜻이다. 앞으로의 종교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만물까지 돌봐야 한다.
양=대한성공회에는 5가지 정신이 있다. 마지막이 ‘창조질서를 보존하며, 지구생명의 회복과 유지에 헌신한다’이다.
신속성, 투명성, 개방성이 코로나19를 극복할 수 있었던 3대 요소이다. 이를 종교계에 대입해 보면?
방=투명성과 개방성은 거의 같은 가치다. 울타리 밖 사람들을 신경 써야 하고, 종교 언어와 비종교 언어에 신경 써야 한다. 신속성은 두 가지 양가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나의 게으른 태도가 상대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는 보편 가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간다는 것이다. 욕망의 설국열차를 탄 것처럼 욕망에 매달려갔다. 그 욕망을 코로나가 멈추게 한 것처럼 신속성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종교에도 제동을 걸어줘야 한다.
양=투명성은 회계의 투명성이 먼저다. 종교가 작동하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교회 입출금 내역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모든 의사결정과정을 공개해야 한다.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도 놓고 함께 가야 한다. 문을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한다.
조=세 가지는 종교와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이것이 바뀌면 세상이 개벽된다. 유교적 개념으로는 명(明), 불교 용어로는 무(無), 개벽 언어로는 양(陽)과 관련이 있다. 개방적이란 것은 개명(開明)하고 간격이 없는 무간(無間)의 상태이고, 투명하다는 것은 명증(明證)하고 사심이 없는 무사(無私)를 말하며, 신속하다는 것은 명민(明敏)하고 걸림이 없는 무애(無碍)의 경지이다. 원불교에서도 ‘과거가 음의 시대였다면 앞으로는 양의 시대’라고 예언했듯이, 개벽종교에서는 이 삼명삼무(三明三無)의 양의 세계를 지향했다.
방=개방성에 대해 덧붙이자면 성서 해석만 보더라도 신자에게는 닫혀 있다. 성서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굉장한 텍스트이다. 이것을 독점해 왔고 여기서 벗어나면 이단이라고 했다. 코로나는 종교에 대한 심판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교만이 가진 텍스트가 아니다. 이것을 열면 삼국지 같은 역동적이고 재밌는 부분이 많다. 또한 삼위일체를 건드리면 큰일 난다. 공론화하지 못하고 무조건 믿으라 한다.
양=성공회에서는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교회 밖에 나가면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들어와서는 봉쇄한다. 거대한 울타리가 성벽을 친다. 울타리를 낮추고 밖으로 나가는 방법은 진리의 독점, 종교의 독점을 내려놓아야 한다.
조=작아야 개방적이다. 조직이 커지면 조직 자체의 논리에 빠진다. 그래서 나는 노자의 소국과민을 좋아한다. 거대해지면 변화도 더디다. 지금은 인문학의 시대이다. 종교인들이 마을 단위로 자그마한 경전 강독회를 열면 어떨까.
사람이 멈추니 지구가 숨을 쉰다고 한다. 생태문명으로의 전환에 대해 지혜를 달라.
방=코로나가 계몽주의, 신자유주의, 자본주의에 태클을 걸었다. 계몽주의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개인의 욕망은 무조건 지지받고 보호받아야 한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개인의 욕망도 공을 위해 절제해야 하는 시대다. 종교도 시민성 안에서 종교성, 공공성 안에서 종교의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
양=KCRP 종교 간 대화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는데 신 중심 종교, 수신 중심 종교가 함께 만나 무엇을 대화할까 고민했다. 생태와 환경, 영성 문제에 있어서는 종교적 차이를 떠나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종교가 공공선을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환경문제는 지금의 문제이지만 우리 후손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큰 것을 설정하면 작은 트러블은 해결된다.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는 지금 ‘지구인문학’을 모색하고 있다. 국가 중심의 인문학을 탈피해서 지구 차원의 인문학을 하려고 한다. 지금까지는 종교가 선교를 통한 세계화의 문제를 고민했다면, 이제는 지구화 시대에 종교의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지구살림을 위해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확장 논리가 아니라 생태 문제로 가야 한다.
사회자 강현욱 교무는 코로나19 이후의 종교의 과제도 있지만 그 변화의 힘도 종교 안에 있다고 말한다. “성주 소성리에서 천주교·개신교·원불교가 연대할 수 있는 이유도 타인의 아픔에 함께하려는 마음이 있어서다. 공공성 안에 종교성을 담아내야 한다. 그러려면 종교가 자신의 것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 이외의 것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6월 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