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널 남궁문ㆍ정형은ㆍ정선희 교도
한울안신문&원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 공동기획
한울안신문 창간 25주년 기획 특별좌담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 종교의 길을 묻다’란 주제로 총 5회에 걸쳐 진행 중이다. 특별좌담 2~5회는 원불교시민사회네트워크와 공동기획했다.
서양에서 영성의 바람이 불어와도 시대의 흐름에 가장 변화가 더뎠던 종교 그리고 원불교가 코로나19를 맞닥뜨리며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본다. 종교는 과연 인류의 미래에 길이 될 수 있을까.
지난 6월 12일 네 번째 특별좌담은 서울교구청 한강교당 대각전에서 이뤄졌으며 유튜브 동그리TV 생방송으로도 담아냈다. 주제는 ‘재가출가가 함께하는 활불공동체’이며, 패널에는 남궁문 원광대학교 교수(전 원무회 회장·어양교당, 이하 문), 정형은 청소년문화연대킥킥 대표(여의도교당, 이하 형은), 정선희 원불교여성회 한울안운동 사무국장(유린교당, 이하 선희)이 참여했다.
사회ㆍ정리=강법진 기자 / 공동기획 원씨네 강현욱 교무
코로나19 창궐로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각자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형은=사람을 덜 만나고 가족과 지내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코로나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성찰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는 과연 식량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이를 대비해 접경지역에 평화마을을 만들어 토종 씨앗을 심고 가꾸고 있다.
문=원광디지털대학교 총장직을 마치고 원광대로 돌아왔는데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을 하다보니 다시 사이버대학에 온 느낌이다(웃음). 외부활동이 줄고 연구실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일상의 변화라면 매일 가던 헬스장을 가지 못하니 집 근처 생태공원에서 매일 만 보 이상 걷기 운동을 하고 있다. 걸으니 힐링도 되고 의두연마가 절로 돼 하루하루가 더 은혜롭고 더 새롭다.
선희=‘환경파괴로 인한 재앙’에 대해 매일매일 일상에서 하나하나 알아차림을 하고 있다. 일회용 안 쓰기, 플라스틱 안 쓰기 등 일상의 실천을 더욱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요즘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은 육식을 중단하는 일이다. 완전 끊었다고 말할 수 없지만 매일 알아차림을 하고 있다.
코로나19로 경제도 마비됐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오랫동안 하면서 마음에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 마음방역을 했는가.
문=사회적 거리두기란 표현이 적정한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거리라고 하니 사람들의 마음도 멀어지는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사회적 거리를 '위생적 거리'라고 생각하면서 ‘마음 거리는 더 가깝게’라는 운동을 하고 싶다. 최근 교당에서 교도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며 코로나19 법회 휴회 시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더니 가장 높은 응답이 법문을 보았다는 의견이었고, 두 번째가 그냥 집에 있었다, 세 번째가 기도생활을 많이 했다고 응답했다. 결국 일상에서의 신앙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형은=귀하게 얻은 시간이라 그동안 건너뛰었던 생각을 깊이 하며 가족들과 함께했다. 나는 건강하다는 오만이 있었는데, 전 세계 팬데믹으로 이어지니까 그때부터 마음을 달리 먹기 시작했다. 종교활동에 있어서는 법회를 못 보니까 원불교는 나에게 무엇인가, 우리에게 코로나19가 말해주는 원불교적인 시사점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선희=지난 2월까지는 출판사 창비의 직원으로 일하며 동시에 원불교여성회와 한울안운동 사무국장 역할까지 해야 했다. 그야말로 1분 1초도 쉴 시간이 없었는데, 2월 퇴사를 하고 소태산기념관 출근을 시작하며 코로나19가 심각해졌고 거짓말처럼 모든 일이 없어져버렸다. 1년에 6번씩 해외출장을 나가며 살았던 것이 마치 전생일 같다. 그렇게 평소에 하지 못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대신 3개월간 교당을 못 나가니까 나의 신앙이 자력 신앙이었던가 돌아보게 됐다. 그동안 나는 교무님, 단장님과 밀당하며 교당생활을 하지 않았나 돌아보며 더 열심히 일기를 쓰고 경전공부를 했다. 자력신앙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법회를 못 가고 교도와의 인간관계가 중단되고 보니,
나에게 원불교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됐다.
그동안 교당을 나오는 이유가 공동체와의 어울림이 컸다면
그것이 빠져나가면서 교법에 대한 무게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라’고 한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이 깊이 와닿았다.
(일요법회 등) 종교활동을 못하게 되면서 일상에서의 신앙이 어떤 의미로 다가왔나.
형은=법회를 못 가고 교도와의 인간관계가 중단되고 보니, 나에게 원불교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됐다. 그동안 교당을 나오는 이유가 공동체와의 어울림이 컸다면 그것이 빠져나가면서 교법에 대한 무게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으라’고 한 소태산 대종사님의 말씀이 깊이 와닿았다. 그 뒤로 컴퓨터 바탕화면에 원포털 ‘듣는법문’을 옮겨놓고 집중해야 할 때 바탕음악으로 활용하고 있다.
문=평생을 원불교를 떠나 산 적이 없다. 주중에 전화가 그렇게 많이 오다가도 주말이면 전화가 안 온다. 그 정도로 종교의 신앙이 내 삶에 깊이 들어와 있다. 하나하나가 감사하고 은혜롭다. 그렇지만 나는 우리 공부 자체가 꼭 교당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처처불상, 사사불공하라고 했고, 생활 속에서 상시로 공부할 수 있게 자세히 밝혀줬다. 요즘 신입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대학에 입학 한 후 대학캠퍼스에 한 번도 못 오고 있는 상황이라 안타깝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내가 맡고 있는 1학년 대학생들을 위해 조석으로 건강과 행복을 위한 기도를 해주고 있다.
선희=나는 어릴 적부터 교당을 다녀서 감사함을 잘 모르고 지냈다. 법회에 나가지 못하는 날 교전을 읽다가 개교의 동기를 읽고 울컥했다. 내가 원불교 신앙인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던 시기였다. 물질문명을 바뤄야 할 인간의 정신이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지 못해 이 일이 생겼는데, 나는 과연 원불교 교도로서 정신세력을 확장하는데 얼마나 노력했는가 하고 참회기도를 했다.
앞으로 시대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고 한다. 일상의 가장 큰 변화는 어디서 올까?
형은=사람들이 이번 기회에 근본적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 같다. ‘한울안’ ‘하나의 세계’에 눈을 뜨면서 종교적 메시지가 일반인들에게도 공감을 주면서 공동의 해결책을 찾아가리라 본다. 그런 흐름에 역행하는 나라는 그동안 누적된 사회문제가 폭발되고 있음을 우리는 보고 있다. 전 세계가 배워가는 긍정적 에너지라고 본다. 특히 이번 코로나19 대응에서 학습한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할 기본소득이나 전 국민 고용보험제도 등과 같은 사회적 장치를 합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다.
문=종교는 인간이 불안과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신에 의지하며 발달했다. 4차산업혁명 시대가 되면서 불확실한 요인이 감소 되고 종교인구도 감소했다. 코로나로 인해 다시 미래에 대한 불확실, 불안이 커졌고, 나만 잘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잘살아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이 살아나게 됐다. 이것이 대종사께서 밝혀준 동포은이고 자리이타 정신이다. 더 많이 공유하고 나눠야 한다.
선희=다들 ‘뉴노멀(New normal, 새로운 기준)’을 말하는데 앞으로의 세계에 ‘노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찰나가 있을까. 새로운 세상은 ‘노멀’이라 부를 수 있는 ‘노멀’이 없는 것이 ‘노멀’이 될 것 같다. 노멀이 없다는 것은 레퍼런스(참조, 스승)가 없다는 뜻이다. 예전에는 가까이에 스승이 있어 배우고 닮아가면 됐지만, 이제는 서로 잘 만나지 못하니까 평상시 수행 적공한 자신의 힘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대다. 그런다고 본다면, 한국은 이제 생활의 빈곤을 넘어 지혜의 빈곤, 영적 빈곤에 더 관심을 가지고 얘기해야 한다.
인간은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제어할 수 있을까
선희=심리상담을 하며 초반에는 좌절을 많이 했다. 사람은 결국 변하지 않고, 혹 변한다고 해도 정말 힘들구나, 라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삼세업장을 녹이고 습을 제거하는 일이니 당연히 쉽지 않을 것이다. 욕망을 제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욕망을 제어하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 아직도 사람이 변한다는 것에 대해 썩 긍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희망을 갖는다면, 영화 ‘인터스텔라’의 대사처럼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형은=욕망을 줄이고자 하는 노력은 불교계에서 오랫동안 외쳐왔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많은 욕망이 확산됐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경종을 바이러스가 준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종교적, 철학적 물음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 속에서 피부로 느끼는 그런 문제로 다가왔고, 그런 질문을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충분히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문=바이러스가 인간보다 더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것은 막을 수 없다. 결국 과학기술을 선용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예견하시고 대종사께서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했고, 도학과 과학을 병진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정신개벽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해 가기 때문에 그 차이를 줄이는 일 즉 정신개벽은 종교 특히 원불교의 역할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환경에 대한 배은의 결과라 할 수 있는 코로나19와 같은 사태의 예방을 위해서는 종교가 먼저 3덜 운동(좀 덜 쓰고, 좀 덜 개발하고, 좀 덜 생산하기)를 실천했으면 한다.
초연결사회에서 어떤 콘텐츠를 가지고 대중에게 다가갈 것인가.
결국 <정전>에 밝혀준 상시응용주의사항과 교당내왕시주의사항,
일상수행의 요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이
콘텐츠로 전달돼야 한다. 우리 교도 중에 그런 공부인들이
많이 나와서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이 사회에 확산돼야 한다.
탈종교화 시대, 원불교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문=코로나19와 종교생활을 묻는 설문결과를 연령별로 분석해 보니 법랍 5년~20년까지가 흔들리더라. 원불교에 입문한 지 5년 이하, 30년 이상의 교도들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러한 국난의 위기 속에 교단이 종교적 메시지를 줬으면 하는 의견이 있는데 결국 그 메시지는 교도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초연결사회에서 어떤 콘텐츠를 가지고 대중에게 다가갈 것인가. 결국 <정전>에 밝혀준 상시응용주의사항과 교당내왕시주의사항, 일상수행의 요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이 콘텐츠로 전달돼야 한다. 우리 교도 중에 그런 공부인들이 많이 나와서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모습이 사회에 확산돼야 한다. 온라인 콘텐츠는 위기인가 기회인가. 온라인으로 가는 순간, 고수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법회를 쉬는 동안 교도들은 법륜스님의 법문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결국 하드웨어(스튜디오)가 문제가 아니다. 콘텐츠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 콘텐츠가 좋지 않으면 오히려 위기다.
형은=우리 교단에도 법륜스님이나 성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사회적 메시지를 낼 수 있는 인물과 집약된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 콘텐츠 요소가 갖춰지면 미디어사업단에서 하드웨어적인 부분은 구축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담아낼지가 중요하다. 대학도 온라인 강의를 시작하면서 서열화가 깨지게 될 것이다. 교사로서 학생들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간다고 열심히 공부하고 좌절의 사다리에서 추락도 하고 그랬는데 그 아이들이 대학의 서열화라는 깨기 어려운 상황을 상당히 깰 수 있는 가능성과 희망을 봤다.
콘텐츠의 중요성은 알면서 그것을 실행할 조직력과 추진력이 약하다.
선희=교화현장에서 다들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개교 100년 만에 이런 건물도 짓고 이만큼 발전한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그 방법이 틀렸다고 말하기 힘들다. 다만 지금은 교체되는 시기이니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게 마당을 만들어주면 된다. 그렇지 않고 서로에게 왜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가뜩이나 작은 종단이 힘을 못 받는다. 되도록 이런 말들은 서로 하지 말았으면 한다.
형은=청소년문화연대킥킥을 맡고 있다. 우리 청소년들이 더 많이 킥킥거리며 웃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은 이름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을 대상으로 북콘서트를 하면, 강연만 하는 것이 아니라 OX 퀴즈를 만들어 작가의 삶을 맞춰보기도 하고 학생들이 작가에게 질문도 하고, 이 책을 영화로 만들면 누가 캐스팅이 되면 좋겠냐고 학생들에게 묻기도 한다. 이러한 쌍방향 소통을 강력히 요구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일방적 설법보다는 질의응답이 오가게 해야 한다. 대종사께서도 설법할 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뭐라고 보느냐 하고 끊임없이 묻지 않았는가. 특히 청소년들은 20년 전과는 달라서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15분 이상 듣지 않는다. 그래서 교사들이 엔터테이너가 되어 있는 상태다. 참여형 수험을 하면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하면서 그 안에서 리더십과 상상력이 키워진다. 무대가 두렵지 않는 학생들이 많다. 그런 것들을 끌어내는 교화를 해야 한다. 원불교도 젊은 교무, 젊은 청년들이 마음껏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수 있게 독려하고 장려했으면 한다. 젊음이 톡톡 뛰는 교단을 지지한다.
문=(우리 인간이) 어리석은 것 중에 하나가 안 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꾸준히 변하고 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 이치를 알면 항상 새롭다. 결국 분별심과 주착심으로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주영 회장의 말처럼 “해보고 얘기하자”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 않고 “나 때는 말이야~” 하는 분별 주착이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변해야 한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했다. 대종사께서 성불의 방편을 제시해 준 것이다. 새로운 것을 자꾸 받아들이려고 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열심히 일한다. 망하는 회사도 일은 열심히 한다. 그런데 까닭있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일일시시로 유무념대조하고 삼학공부로 자성공부를 하면서,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이 돼야 한다. 이노베이션이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는 이 순간에도 나아가고 있고 바뀌어 가고 있다.
개개인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정단위의 과감한 결정도 중요하다.
문=계획을 세우면 반드시 실행하고 평가해야 한다. 우리 교법의 체계 역시 실행하고 대조(평가)하는 시스템으로 되어있다. 원불교 공부는 항시 유·무념 대조하고 생활 속에서 일상수행의 요법 등을 대조하자는 것이 그 원리다. 원불교인은 생활 속에서 경계마다 대조(평가)하는 생활을 한다. 생활 속에서도, 교단 일을 하는 데도 그러한 실행과 평가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대종사께서 밝혀주신 교법대로 하면 된다. 점검하고 또 점검하면서 될 때까지 해야 한다.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형은=법위등급 평가기준은 모르지만 날마다 나를 돌아보고 수지대조한다. 3년째 하고 있다. 수지대조를 하고 보니 돈을 쓰지 않는 날, 몇만 원으로 지출을 줄이고 싶은 마음이 난다. 상시일기를 기재하니 내가 생각한 것을 실행했는지, 실행하지 못 했는지도 여실히 드러난다. 나의 소비를 한눈에 볼 수 있고, 그 흐름도 볼 수 있어서 좋다. 원불교는 교법의 시대화 대중화 생활화를 얘기하는데 교도님들이 교법의 생활화는 잘하고 있다. 하지만 대중과 더 많이 함께하려면 교법을 시대화 해야 한다. 100년의 역사가 짧긴 하지만 기성종교들도 그때부터 갈라졌다. 어쩌면 우리도 변화할 때이다. 새롭고 참신한 콘텐츠가 나올 수 있게 다양한 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여러 마당이 교단 차원에서 만들어줬으면 한다. 미리 예단하고 그래봤자, 그렇게 해서 뭐가 달라지겠느냐고 하지 말고 기회를 줬으면 한다. 대종사께서도 “아무 소용 없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했다. 수십 년 그 일을 해온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대중화와 시대화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을 위해 원불교는 무엇을 해야 할까, 함께 생각해 봐야 한다.
선희=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명제가 있다. 원불교의 처음 시작은 가장 진화된 정신개벽 운동이었지만, 교단이 안정화 되고 조직화 되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종교라는 제도의 틀을 갖게 됐다. 그 종교라는 틀을 얻으면서 어쩔 수 없이 고등종교의 계통 발생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선천종교가 2천년 동안 정교화시키고 반복했던 종교적 의례(ritual)를 우리도 따라가려 하는 경향성이 보인다. 그것이 진화의 단계에서 밟아야 할 과정이었다면 짧고 빠르게 경험했으니, 이제 거기까지만 하자. 원불교가 인류가 만든 가장 진화한 종교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선천시대의 종교가 했던 일들을 반복해서는 안된다. 코로나 사태는 그것과의 결별을 선언하라는 확실한 경고다. 후천개벽시대의 종교로서 원불교의 미래가 종교 그 자체의 미래라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선천 시대의 종교가 가진 형식은 과감히 버려도 이제 대부분 원불교가 이상한 종교라 하지 않는다. 외형을 갖추기 위해 이제까지 많이 노력하셨고, 잘하셨다. 이제는 ‘본의’로 돌아가서 정신개벽을 했으면 좋겠다.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다. 그러면 후천개벽, 정신개벽의 종교의 길은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
문=답은 항상 가까운 곳에 있고, 현장에 있다. 우리가 답을 못 찾는 것은 답이 아주 특별한 것이고 멀리서 찾으려고 해서이다. 대종사께서 이런 시대를 예견하고 우리 공부법을 내주셨다. 다시 <정전>을 공부하면서 보니까 이 시대가 올 줄 알고 이 법을 내셨구나 하는 생각이 더 든다. 코로나 시대에 온라인을 병행하는 것이 종교의 위기인가 기회인가? 온라인 대중화 시대에 콘텐츠가 생명인데 우리는 원불교만의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소재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대학도 그렇고 현재의 교육이 절름발이 교육을 하고 있다. 교육 공학에서 연구한 것을 보면 강의(설법)식 교육은 인지율이 5%이고, 강의를 듣고 책도 보고(경전공부) 하면 인지율이 10%가 된다고 한다. 거기에 회화까지 하면 인지율이 30%로 올라온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은 일방적인 교육이다. 따라서 서로 토론(회화)도 하고 만들어도 보고, 발표(강연, 의두, 성리)도 하다 보면 인지율이 70%로 올라오고, 마지막 교육의 꽃인 가르쳐 보면 90%가 내 것(교화단 교화)이 된다. 4차산업혁명 인재 양성의 핵심 교육도 바로 이러한 교육방식이다. 이것은 바로 <정전>에 밝힌 11과목 훈련법으로 공부하는 것이다. 교화활성화를 위해서는 문답감정과 교화단 교화로 하고, 서로서로가 지도인이 돼야 한다. 지도인들은 <정전> 최초법어에서 밝혔듯이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 제1조, 지도받는 이의 이상의 지식을 가져야 한다를 되새겨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는 공부를 해야 한다. 불법시생활·생활시불법을 일상생활화 해야 한다. 그래야 시대에 맞고 대중과 통하여 교화로 이어진다.
지금까지는 출가위주의 교단이었다면 앞으로 100년은 재가출가가 함께하는 활불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 특히 청소년교화에 함께 지혜를 모아야 할 것 같다.
형은=우선 교과서에 원불교 내용이 실려야 한다.(지난해 수능출제문제에 원불교가 나온 것은 고무적이다) 그렇게라도 해야 청소년들에게 익숙한 종교, 최소한 들어본 종교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교과서 편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고 일반서점에서도 검색 가능한 어린이책 속에 원불교 이야기가 들어가야 한다. 기타 원불교 문화상품, 기념품도 많이 나와야 한다. 나는 외부에 가면 원불교 캐릭터 볼펜을 일부러라도 쓴다. 이러한 매개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젊은 교무들이 하는 유튜브 방송도 좋은 매개체이다.
문=나도 청소년들을 이해하기 위해 <90년대생이 온다>라는 책을 3번 읽었다. 우선 청소년들을 이해해야 한다. 지금 청소년 정책 결정을 누가 하는가. 어른들이 하고 있다. 중앙교구에서 원무들이 청소년교화를 한다고 하는데 평균연령이 55세다. 물론 할 수도 있지만 다르다. 청소년을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재가출가가 함께 지도자로 양성해야 한다.
지금은 경계가 희미한 시대를 만나서 희미한 채로
자신의 정체성(개성)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두 개가
양립할 수 없는데 양립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정전> 교법의 총설을 보면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라고 했는데 첫 번째가 종교의 틀을 깨라는 말씀이고,
둘째는 출재가가 구분이 없는 종교의 신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경계가 희미해진 때에 두 가지 숙제를 우리에게 줬다.
경계선이 뚜렷하면 뚜렷할수록 대종사님의 법문은 아니다.
교단 발전에 재가단체의 역할도 컸다. 재가교도들의 역할을 어떻게 확대할 수 있을까.
선희=의사결정 과정에서 책임과 의무를 어떻게 동등하게 지느냐를 연구하면 좋겠다. 이는 출가에게 과도하게 짐 지워진 교단 수호와 운영의 의무를 나누자는 뜻도 된다. 전무출신의 선공후사 정신이 없었다면 우리 교단이 이만큼 뿌리내리고 성장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무출신은 교단의 물리적 수호자이기도 하지만, 인류를 위한 도덕의 지도자가 되어야 할 귀중한 존재이다. 인류의 정신문명을 각성시키는 큰 스승의 역할에 더욱 풍덩 빠지시라. 그리고 현실적으로 발생되는 각종 업무는 생업으로 이를 실전에서 경험한 재가교도와 함께 하는 것이 ‘지자본위’로서도 맞고 실용의 측면에서도 낫다.
대종사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숙제를 줬다. 과거에는 경계가 분명한 시대였는데, 지금은 경계가 희미한 시대를 만나서 희미한 채로 자신의 정체성(개성)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사실 두 개가 양립할 수 없는데 양립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정전> 교법의 총설을 보면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라고 했는데 첫 번째가 종교의 틀을 깨라는 말씀이고, 둘째는 출재가가 구분이 없는 종교의 신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경계선이 뚜렷하면 뚜렷할수록 대종사님의 법이 아니다. 경험을 하나 했는데, 한울안운동이 라다크에서 청소년교화 사업을 하고 있는데 작년에 라다크 서쪽 이슬람지역에서 자신들도 무료교육을 해달라고 해서 위험지역이긴 하나 가서 강의를 했다. 그때 졸업식에서 한마디 하라고 해서 ‘자력양성’ 이야기를 했다. 학부모들이 세상에 그런 좋은 이야기는 처음 들어봤다며 좋아했다. 만약 내가 그곳에서 원불교를 믿으라고 했으면 총 맞았을 것이다. 그때 깨닫게 되었다. 이들을 원불교 교도로 개종시킬 수는 없지만 이 마을 사람 전체를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로 살게 할 수는 있겠다고. 파키스탄에서 마호메트의 참 제자면 대종사의 참 제자가 되고, 티베트에서 달라이라마의 참 제자라면 대종사의 참 제자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 방식으로의 교법의 세계화를 이뤄갔으면 한다. 경계를 짓고 반드시 내 종교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희미한 경계 속에서 대종사의 가르침을 더 넓혀 나가는 방법을 모색했으면 좋겠고, 출가와 재가의 경계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원불교에 바란다.
형은=교당 내부의 일을 많이 하려기보다는 세상 속으로 나가는 일들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지역사회 주민들이랑 청소년들도 들락날락하는 열린 문이 되었으면 한다. 청소년들은 자기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내가 누군지를 알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을 바란다. 여기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하나 더 바람이 있다면 여자교무들의 복장과 머리스타일도 과감하게 바꿔야 한다. 그래서 시대를 선도해 갈 수 있다.
선희=100년 전 여성교무들이 편의성과 실용성을 위해 정복을 택했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가 나온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본의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여자 교무님들께서 가장 편하고 가장 멋지고 가장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 좋겠다. 그런 변화 속에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문=집단이 발전하려면 무슨 일이 있을 때 본래 마음자리를 찾는다. 어느 부분에서 지금 대종사의 본의에 괴리가 생겼는지 점검도 하고, 내실을 다져야 한다. 내실은 나무의 뿌리와 같다. 원불교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시대의 비전을 선포했다. 이제는 실행이다. 재가출가가 함께 노력하고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6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