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울안신문=강법진] 원불교 변산제법성지는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에 위치한 변산국립공원 안에 자리하고 있다. 흔히 내변산이라 불리는 이곳 국립공원에 종교 성지가 있다는 것은 장점이면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소태산 대종사(이하 대종사)가 4년간 기거하며 수많은 성리법문과 교리 강령을 선포한 곳이지만 100년이 지난 지금도 그곳은 원불교라 이름할 만한 땅이 없다. 성지가 있는 구획 전체가 현재 실상사 소유의 땅으로 되어 있다. 여름철 신록은 무성한데 외로운 실상초당 터와 석두암 터 그리고 인적이 드문 봉래정사를 마주하니 죄스러움마저 든다.
기미년(1919) 12월 11일, 대종사가 영광 백수 길용리에서 출발해 서해안 육로로 2백리 길을 걸어 다음날 도착한 곳은 월명암이었다. 그해 3월 다녀간 후, 두 번째 방문이다. 이곳에서 정산종사가 3개월 넘게 백학명 선사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잠시 지친 몸을 의탁하던 대종사는 제자들의 간청으로 산 아래로 내려와 두 칸 초옥과 논밭 경작권을 매입해 생활하니 이곳이 ‘실상초당’이다. 본래는 두 칸 초옥이었으나 이만갑 선진의 희사로 방 한 칸을 더 증축해 방 두 칸, 부엌 한 칸에서 송적벽과 김남천 그리고 김남천의 딸 김혜월과 외손녀인 이청풍이 대종사를 시봉하며 궁핍한 생활을 했다.
그럼에도 인근 각지에서 법문을 듣고자 찾아온 제자들이 날이 갈수록 늘었다. 대종사의 비범함을 알아본 사람들은 세상에 나가 구국운동 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대종사는 “태평양 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이 몽둥이로 때려서 몇 마리나 잡으며, 얼마나 큰일을 하겠느냐. 태평양 고기를 잡으려면 먼저 큰 그물을 장만해야지. 그와 같이 나는 천하를 구원할 그물을 만들고 있다”고 응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기5년 4월 실상초당에서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와 공부의 요도 삼강령 팔조목’을 새 회상 교리 강령으로 공식 발표한다. 일원상(원기4년 금산사에서 처음 그려 보임)을 종지로 한 교강을 선포한 것이다. 이는 후일 원기12년에 발간된 『수양연구요론』에 수록된다. 대종사는 그 서문에 “인생의 목적은 수양에 있고, 수양의 목적은 연구에 있고, 연구의 목적은 혜복을 구하는 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변산반도는 예로부터 소금과 해산물이 풍부하고 수림이 울창해 살기 좋은 고장으로 정평이 나 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고의 ‘산해절승(山海絶勝)’이라 했다. 월명암을 비롯해 내소사, 개암사, 실상사 등 천년 고찰이 자리하고 있고, 삼국시대에는 변산 골짜기에 수천 개의 크고 작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월명암은 부설거사 일가족이 도를 이루고, 진묵스님을 비롯한 백학명 선사가 정진하던 최고의 수행처다.
대종사는 변산에서 은거하는 동안 자신의 호를 ‘석두거사(石頭居士)’라 칭하고 거처를 석두암(石頭庵)이라 이름했다. 대종사가 이처럼 ‘돌 석(石)’를 즐겨쓴 것은 변산이 크고 작은 바위들로 이뤄졌고, 수많은 수행자가 다녀간 곳이기 때문일 터. 대종사가 단기간에 성리법문을 쏟아낸 곳도 이곳 변산이다. 하루는 대종사가 봉래정사에서 제자들에게 그 한 수를 써주며 ‘변산구곡로(邊山九曲路)에 석립청수성(石立聽水聲)이라 무무역무무(無無亦無無)요 비비역비비(非非亦非非)라’하며 “이 뜻을 알면 곧 도를 깨닫는 사람이라”고 했다.
*원불교 교리 강령 선포 100주년 맞이 50일 기도 (문의 전북교구) 원기105년 7월 19일 ~ 9월 6일
7월 1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