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분별이 항상 정을 여의지 아니하여,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 영지의 자성에 부합이 될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대승선(大乘禪)이요 삼학을 병진하는 공부법이니라.」
다시 정리하자면, 분별이 정(定)을 여의지 않을 때에, 육근동작 하나하나가 다 공적영지의 성품작용입니다. 이것이 대승선이며, 삼학병진의 공부법입니다. 대승선은 누구나 차별 없이 닦아서 모두가 불과(佛果)를 성취할 수 있는 선입니다.
삼학병진이란 세 가지 공부가 함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삼학(정·혜·계, 수양·연구·취사)이 각각 따로 진행되는 게 아니라, 모두 같이 이루어지는 공부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알다시피 수양 연구 취사를 동시에 닦을 수는 없으며, 이를 각각 분리해서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무시선법은 이 세 가지를 모두 동시에 닦는 공부입니다.
그럼 여기서 수양 연구 취사로 나뉜 삼학공부와 삼학을 병진하는 무시선법의 차이를 살펴보겠습니다. <정산종사법어> 경의편 18장에는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수양 연구 취사의 삼학으로써 공부를 진행하는 바, 결국 수양은 해탈이 표준이 되며, 연구는 대각이 표준이 되며, 취사는 중정(中正)이 표준이 되나니라.」
이처럼 정신수양의 표준은 해탈(解脫)입니다. 그런데 대개 수양을 하다 보면 자칫 공적(空寂)에 빠지는 수가 많은데, 이 공적상태[無記]를 선(禪)으로 아는 경우가 매우 흔합니다. 이렇게 되면 수양의 목표인 해탈과는 완전히 어긋나버립니다. 반면에 무시선법은 진공으로 체를, 묘유로 용을 삼아 누구나 생활 가운데 시간과 처소에 관계없이 닦을 수 있는 공부입니다. 이와 같이 진공묘유로써 무시선법을 닦아가면 마침내 진세(塵世)에서 백천 삼매를 얻게 됩니다.
둘째, 사리연구의 표준은 대각(大覺)입니다. 공부인이 연구에 몰두하다 보면 연구하는 대상에 마음이 끌려서 자기도 모르게 분별심을 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지식은 쌓을지라도, 연구의 궁극목표인 대각과는 정반대로 갑니다. 반면에 무시선법은 우리의 분별이 정(定)을 여의지 않게 하는 공부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육근을 작용하는 바가 다 공적영지를 떠나지 않게 하는 공부입니다.
셋째, 취사의 표준은 중정(中正)입니다. 하지만 누구든 취사를 하다 보면 사리(事理)에 매여서, 저도 모르게 경계마다 시비(是非)에 집착하지 않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되면 취사를 잘 한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중정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반면에 무시선법은 천만 경계에서 주한 바 없는 마음[無住心]을 쓰는 공부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체법을 행하되 걸리고 막히는 바가 없고, 마침내 불이문(不二門)에 드는 공부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무시선법은 자성을 떠나지 않고, 언제나 공원정을 나투는 수행법입니다. 이로써 삼학공부의 표준인 해탈·대각·중정을 다 같이 이루는 수행입니다. 때문에 우리 교전에서는 오직 이 무시선법을 삼학병진의 공부법이라 못 박고 있습니다.
9월 1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