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와 만남 그리고 이별
“대종사님을 찬찬히 못 쳐다봤어. 눈빛이 달라. 그 압력에 고개 들고 찬찬히 못 쳐다봐. 그렇게 인자하셨는데도 오래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었제.”
영산에서 나고 자라 지금까지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다는 덕산 탁무영 교도(88). 그가 태어난 곳은 구호동 소태산 대종사 집터 앞집이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외숙인 그는 어려서부터 대종사를 친견하는 일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는 특히 칠팔 살 무렵에 뵌 대종사를 많이 기억했다. 어머니(박원영)가 대종사보다 열 살 아래 사촌여동생인 덕분이다.
“대종사님은 가끔 오셨어. 그날은 동네사람들이 다같이 인사드리고 그랬제.”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에 영산선원에 들어와 이수오, 이백철, 박재봉 선진들과 선원생활을 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고 선원이 해산되자 다시는 그 길을 갈 수 없었다. 집안이 어려워 본인이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태며 중·고등학교를 다녀야 했기에 선원 공부는 꿈도 못 꿨다. “초등학교 때까지 일원상서원문, 반야심경 외운 게 기억나. 그때 (영산선원) 해산하지 않고 익산 총부로 올라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내가 열두 살 때였어. 대종사님이 열반하셨다는 소식에
동리 사람들이 다 총부로 달려갔는데
일본 순사들이 사람들을 가로막고 못 오게 했대.
어머니가 너무 화가 나고 슬퍼서...
당시를 떠올리면 아쉽기만 하다. 그때가 그에게는 인생의 큰 갈림길이었던 것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아버지도 학자였는데 대종사님을 따르지 않았어. 대종사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셨던 거지. (대종사님은) 전 인류를 한 가족으로 보는 분이셨기 때문에 내 친척이라 해서 따로 챙기시지 않았어. 그 뜻을 알았어야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배움이 부족해서 대종사님의 그 넓은 생각을 이해 못 했던 것 같애. 그래서 대종사님의 외가·친가 조카들 중에 교단에서 성공한 사람이 없어.”
그는 소태산 대종사 열반 당시 발인식에 참여했던 어머니의 일화도 전했다. 당시 영산 동리사람들은 대종사의 열반 소식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같이 장성역까지 걸어가 가슴을 쓰다듬으며 익산역(당시 이리역)에 도착해 총부까지 또 걸어갔다.
“내가 열두 살 때였어. 대종사님이 열반하셨다는 소식에 동리 사람들이 다 총부로 달려갔는데 일본 순사들이 사람들을 가로막고 못 오게 했대. 어머니가 너무 화가 나고 슬펐다는 이야기를 영산에 와서 들려줬어. 영산에서부터 울고갔으니 익산까지 그 길이 얼마나 멀었겠어. 그런데 막상 거기 가니까 울지도 못하게 해서 많이 속상했제.”
기억 저편의 영산풍경
그가 어릴 적에는 길룡리 밭에 목화, 조, 콩을 심었다. 워낙에 다작이라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밭에 가면 밭둑마다 교도들의 이름이 팻말에 적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법회가 끝나면 자기 팻말 밭두렁에 가서 풀도 매고, 돌도 줍고 그랬어. 내가 어머니 따라다니다 본 기억이 있어. 그러면 대종사께서 뒷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하셨지. 그때는 밭에 자갈이 많아서 호미질하려면 힘드니까 여자 교도들이 ‘에이, 이놈의 자갈이나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한 거야. 뒤에서 그 말을 들은 대종사께서 ‘자갈 미워하지 마라. 그 자갈이 천금같이 쓰일 날이 곧 온다’고 하셨어.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제.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자갈을 다 가져다가 도로 포장하는 데 쓰고, 황토 깔아서 논 만드는 데 쓰고 그랬어. 그걸 대종사께서 미리 아셨던 것 같아. 그때 우리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허망한 소리인 줄만 알았제.”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어느 날은 대종사께서 몇 년 안 지나면 죽은 나무에 꽃이 핀다고 하시는데 보통 사람이 들으면 참 허망한 말이었제. 얼마 되지 않아서 영산 궁촌벽지에 전기가 들어왔어. 그때 그 뜻을 알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대종사님 말씀은 새록새록 간절해지고 존경스러워. 지금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어.”
한 번은 그의 어머니가 소태산 대종사의 구도 시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외숙모(양하운 대사모)랑 결혼하고 나서도 대종사님이 삼밭재에 가서 입정을 계속하셨대. 새 각시였던 외숙모가 외숙이 얼마나 그리웠겠어. 그래서 고사리 꺾으러 가는 마을 사람들 따라서 그 험한 산길을 올라간 거야. 삼밭재까지 올라간 외숙모가 대종사님 옆에 앉아 있는데 눈 감고 쳐다도 안 보더래. 어쩌겠어. 결국 눈물바람만 하고 내려오셨다고 해.”
사실 어머니에게 그 말을 듣고서야 그도 양하운 대사모가 대종사의 사모인 줄 알았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11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