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구호소 소장은 류허일, 부소장은 송도성이 임명된다. 송도성은 수위단회 중앙이며 총무부장으로 서울구호소뿐 아니라 이리 후생부와 부산, 전주 후생원의 총책임자 역할까지 맡게 된다.
전재동포 서울구호소는 원기30년(1945) 9월 10일에 서울역 앞 남대문통 5정목 70번지 적산가옥 3층 집에 설치된다. 1층은 급식소, 2층은 사무실로 불법연구회에서 사용하고 3층은 개인이 사진관으로 사용했다.
광목천에 세로로 ‘불법연구회 귀환동포 구호소’라 써서 붙이고 서울역 앞으로 몰려드는 귀환 동포들을 맞이했다.
송도성은 서울지역 전재동포 구호사업소의 본부가 있는 서울시청에 찾아가서 구호사업을 위한 물자를 도와 달라 요청했으나 도움을 받지 못하다가, 황정신행의 외교 노력으로 미군부대에서 트럭으로 식량과 의복 등 구호물자를 실어 와서 유용하게 활용한다.
김윤중, 정자균, 정성집 등 남자청년 임원들은 서울역 앞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귀환동포들을 구호소로 안내하여 의복, 신발, 담요 등을 나눠 주고, 이성신, 정재윤 등 서울지부 회원들은 따뜻한 물과 주먹밥을 만들어 나눴다. 하루에 500명 정도가 몰려와 박창기도 총부에서 올라와 일손을 도왔다.
구호소 2층 사무실에 구호사업 물자를 보관관리하기 위해 돈암동 서울지부 남자숙소가 옮겨와 사무실과 숙소를 겸하게 되고, 이중정은 이곳에서 회계업무를 보았다.
미군들은 불법연구회 회원들의 헌신적인 구호사업에 감탄하며 구호품을 가져오길 즐겨했고, 웃으며 맞이하는 송도성을 ‘붓다 송’이라 부르며, 구호사업 활약상을 카메라에 담고 취재까지 했다.
당시 다른 구호단체에서는 구호물자를 빼돌리는 경우도 있었으나, 불법연구회에서는 그런 일이 전혀 없었다. 송도성은 “양말 한 켤레라도 저 사람들을 위해 나누어주라”고 강조했다. 불법연구회의 진실한 활동에 미군뿐만 아니라 건국준비위원회에서도 후원을 적극적으로 했다. 거국적인 구호사업에 30여 개 단체가 참여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단순 봉사활동만 하는 8·9개 단체만 남게 된다. 불법연구회에서는 물질적 구호뿐만 아니라 정신적 주체성과 인격수양까지 강조하며 교법정신에 입각한 전단을 작성하여 나눠주기까지 했다.
정산종사는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 국가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광복 직후 새 나라의 국가이념과 방안이 담긴 『건국론』을 1945년 10월 프린트 판으로 발간하여 정계와 교단요인들에게 배부한다. 『건국론』은 마음단결, 자력확립, 충의봉공 등 국가와 교단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전재동포구호사업의 사상적 바탕이 된다. 불법연구회 서울구호소에서 서울지부 임원과 회원들은 식사뿐 아니라 병자 간호, 고아 보호까지 밤낮으로 활동하였고, 개성지부 회원들은 의복을 만들어 나눠주었다. 불법연구회 회원들의 헌신적이고 지속적인 구호사업에 김구, 김규식, 신익희, 조소앙 등이 격려차 자주 다녀갔다.
귀환동포 가운데에는 학병으로 끌려갔던 청년학생이 많았다. 서울에 돌아온 학생들은 자체 연맹을 조직하여 서울에서 가장 큰 강당인 부민관에서 ‘명사 사상 강연’을 주최하며, 송도성을 종교계 대표로 초청한다.
송도성은 청년학생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사상 강연을 하며, 매월 넷째 주 수요일마다 경성방송국에 가서 방송설교를 하게 된다. 이는 교단 역사상 처음 있는 대중강연이었다.
불법연구회 서울구호소 전재동포구호사업은 1945년(원기30) 9월 10일부터 1946년(원기31) 3월 31일까지 6개월 20일간 지속했으며 소요된 경비는 50만 원, 식량은 백미 가마, 잡곡 240가마가 들어갔다.
구제 상황은 급식 42만 명, 숙박 인원 11만 명, 의복 제공 3천 건이다. 이런 무아봉공의 구호사업은 지역사회의 신뢰를 얻게 되고, 불법연구회는 남산에 있는 일본인 사찰 약초관음사와 용산에 있는 용광사를 불하받게 된다.
글/박혜현 정릉교당 교도, 서울원문화해설단 부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