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를 한 번만 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학부 시절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했다는 선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부럽던지 그 날은 저녁식사 후에 성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꿈에서라도 대종사를 만난 날이면 이 세상에 더 이상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함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금강경〉의 법문에서 부처는 이미 무언(無言)과 유언(有言)으로 그 정수를 전해주었다. 부처의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은 부처를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자연히 그 모습에 집착하는 마음이 간혹 생겨날 수도 있다.
대종사의 제자 이재풍도 대종사를 친견할 때마다 보통 사람과 다른 점을 대종사의 모습에서 살피려고 하였는데 하루는 이재풍을 불러 “성현을 마음의 법으로 찾으려 하지 아니하고 몸의 표적으로 찾으려는 것은 곧 하열한 근기인 것이다”라고 당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부처 또한 제자들이 혹여나 같은 실수를 할까 염려되어 대자대비의 심경을 담아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무릇 형상 있는 바가 다 허망한 것이니, 만일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凡所有相은 皆是虛妄이라 若見諸相非相이면 則見如來니라)
부처의 신상(身相)을 보통 32상이라고 하는데 이는 부처를 존경하는 마음에 부처가 보통의 인간과는 다르다고 여기고 그 다른 점을 32가지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는 색상(色相)이나 음성 등과 같은 신상을 통해서는 결코 여래를 볼 수 없음을 분명히 말씀한다. 이에 정산종사는 “가령 사람의 인물을 외모만 보고 전부를 다 보았다 할 수 없고 그 사람의 위의 언어 지식 용심 등을 다 보아야 그 인물을 참으로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이, 여래를 보는 법도 보통 사람으로서는 가히 볼 수 없는 경지가 있나니, 모든 상이 공하고 자타 피차가 없는 유무초월한 자리를 깨쳐 법신 보신 화신 전부를 체득해 보아야 비로소 여래의 전부를 본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상이란 색상뿐만 아니라 명상(名相)과 심상(心相) 모두를 포함한다.
대산종사는 “출가 후 ‘대종사를 성인 가운데 가장 큰 성인이시다’ 하고 우러러 받들고 살았으나, 내 나이 30세에 대종사께서 열반하시매 한동안 방황을 하다가, 내가 그동안 대종사의 색신만 모시고 살았지 법신을 뵙지 못하고 살았음을 깨닫고 그 후부터는 법신을 모시기 위해 적공을 계속하였느니라”고 회고한다. 여기서 말씀한 법신이 곧 여래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금강경〉 5장의 대의를 ‘여래의 실상자리를 직접 들어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종사의 색신이라도 보고 싶어 애쓰던 나 같은 근기는 어찌해야 대종사의 참모습인 법신을 모시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부처의 진정한 신상이란 32가지 수행상(修行相)으로 ‘오근(五根)×육바라밀(六波羅密)+무상(無相)+무위(無爲)’를 가리키며 ‘내가 32가지 수행상을 닦는다’는 그 흔적마저 남아 있지 않아야 비로소 참다운 수행이라 말한다. 각행의 표준을 밝힌 ‘일원상 법어’의 말씀대로라면 ‘육근을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게 사용하자는 것’이며 이를 다시 일상생활 속에서 훈련으로 단련하는 길이 ‘상시응용주의사항 6조’이다. 대산종사는 상시응용주의사항 6조 공부에 대해 “이 법은 대종사께서 평생을 통해서 하신 공부길이요 영생의 공부표준이시며 누구나 스스로 성불하여 영겁에 불퇴전이 되도록 하신 법이다”라고 천명했다. 대종사가 영생을 통해 공부표준으로 삼아 걸어가는 공부길을 우리도 불퇴전의 정성으로 따라간다면 이것이 곧 대종사의 법신을 모시고 사는 길이 아닐까.
“대종사의 법신을 모시고 사는 길 : 법대로(法大路)”
5월 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