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께서는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고자 개교를 했다. 중생들이 부처임을 깨달아 마음의 안정, 생사의 해탈, 죄복의 자유, 희망적인 삶, 입정처, 낙원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진급하는 방법으로 일원상의 진리를 깨닫고, 신앙하고, 수행하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법을 물샐틈없이 제시하여 줬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중생의 삶을 계속해가고 있다. 나는 그것이 이론과 실제에서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삶은 단순하지 않지만, 교리는 간결하다. 실제 삶은 복잡하고 변수가 많지만, 교리는 명확하다. 그렇다면 교리적인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일까?
누구나 간절히 바라는 꿈이나 목표가 있다. 그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미래이고, 상태이다. 실현 가능한 수준의 작은 꿈이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꿈을 위해 죽을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부처임을 깨달아 마음의 안정을 얻고, 생사를 해탈하며, 죄복의 자유를 누리고 낙원생활을 하는 것도 그런 꿈이나 목표일까? 그렇지 않다.
대종사께서는 ‘도를 깨치는 것이 밥 먹기보다 쉬운 일’이라고 하셨으니 죽을 때까지 열심히 노력해야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한 생각을 고쳐먹으면 모두가 은혜로 바뀐다. 이렇게 쉬운 것이 바로 곧 낙원생활의 길이다. 다만 그 ‘고쳐먹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업장으로 인해 잘 안 된다는 것이 함정이다.
중생들을 보면 부처임을 알고자 열심히 노력하는 이도 있고, 노력하지만 잘 안 돼 실망하는 이도 있고, 아예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 모르는 이도 있다. 또는 부처가 되고자 관심을 가진 중생도 있고, 아예 관심이 없는 중생도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런 것에 전혀 관련이 없는 중생들도 있다. 공부가 어려운 중생도 있고, 삶이 힘들어 공부할 생각을 할 수 없는 중생도 있으며, 몸과 마음이 병들어 공부할 여건이 안 되기도 하고, 어떤 상황에서인지 희망이 끊어진 중생들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 주변을 보면 처한 상황과 형편이 모두 제각각이다. 그러니 그에 대한 처방전도 각기 달라야 함이 맞지 않을까? 내가 어렸을 적에는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노력하지 않거나 머리가 나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닫게 된 그것은 세상에는 공부에 관심을 가진 이가 드물고, 더불어 잘 가르치는 사람도 드물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실력을 갖추지 못함을 한탄하고, 경쟁력이 없어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자신도 예외는 아니어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것은 비단 학교 공부뿐만 아니라 도학 공부도 마찬가지다.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수준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나의 수준,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자산, 시간 등을 명확히 알고, 불공을 드려야 한다. 여기에는 자력과 타력이 필요하다. 스스로 평가하고, 현실적으로 계획도 세우며, 참회 기도를 통해 간절히 진급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내가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지도인과 문답감정을 해야 하고, 부처가 되기 위한 교도 훈련과 교리 공부도 놓지 말아야 한다.
‘디지털교화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져 놓고는 장황하게 ‘디지털’과 거리가 먼 이야기만 하는지 반문할 수도 있겠다. 이제 본론이자 결론인 이야기를 해보면 나는 이 장황한 이야기들 속에 디지털 도구를 활용할 곳이 많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5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