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죄업의 근본은 탐·진·치(貪嗔痴)라 아무리 참회를 한다 할지라도 후일에 또다시 악을 범하고 보면 죄도 또한 멸할 날이 없으며, 또는 악도에 떨어질 중죄를 지은 사람이 일시적 참회로써 약간의 복을 짓는다 할지라도 원래의 탐·진·치를 그대로 두고 보면, 복은 복대로 받고 죄는 죄대로 남아 있게 되나니, 비하건대 큰 솥 가운데 끓는 물을 냉(冷)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위에다가 약간의 냉수만 갖다 붓고, 밑에서 타는 불을 그대로 둔즉 불의 힘은 강하고 냉수의 힘은 약하여 어느 때든지 그 물이 냉해지지 아니함과 같나니라.」
「세상에 전과(前過)를 뉘우치는 사람은 많으나 후과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적으며, 일시적 참회심으로써 한두 가지의 복을 짓는 사람은 있으나 심중의 탐·진·치는 그대로 두나니 어찌 죄업이 청정하기를 바라리요.」
죄업은 무명으로부터 비롯되고, 무명의 속성은 ‘나(ego)’라는 것[我相]에서 오는 탐진치입니다. 비록 과거의 죄를 뉘우쳤다고 할지라도 다시 또 죄를 짓게 되는 것은, 마음 밑바닥에 자리를 잡은 이 에고로부터 탐진치가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는 계정혜(戒定慧) 삼학을 두어서 이 에고로부터 오는 탐진치를 다스리게 하고 있습니다.
즉, 계율로써 중생의 모든 탐욕과 집착을 끊도록 하고, 선정으로써 온갖 번뇌를 일으키는 분별 망상을 가라앉히며, 지혜로써 제법(諸法)의 실상을 깨달아 미혹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삼학인 정신수양·사리연구·작업취사도 이 계·정·혜 삼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업은 무명의 소산(所産)이며 삼독은 이 무명에서 비롯된 것이니, 아무리 탐진치를 없애려고 한들, 무명이 작동하는 한 이것들을 결코 없앨 수가 없습니다. 한평생을 공부해온 수행자라도 수없이 좌절하는 것이 바로 이로부터 오는 갈등입니다. 수·연·취(수양·연구·취사) 삼학을 비록 열심히 닦아도, 이 에고[我相]를 떠나있는 자리, 즉 공원정(空圓正)의 자성을 좀처럼 알지도, 체험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수·연·취 공부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불법 수행이 두 가지의 길이 있음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는 나[ego]의 의지로 닦아가는 공부이고, 또 하나는 자성(自性)을 기반으로 하는 공부입니다. 에고로써 닦는 공부는 언제나 대상에 머묾[住]이 있는 수행이며, 자성을 기반으로 하는 공부는 대상에 머묾[住]이 없는 수행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시비와 선악, 부처와 중생 등 대상을 분별하는 마음으로써 닦는 공부는 물듦이 있는 수행입니다. 그러나 일체의 분별과 주착을 떠난 마음, 즉 주한 바 없는 마음[無住心]으로써 닦는 공부는 물듦이 없는 수행입니다. 우리 정전에서 보면 수·연·취 삼학은 언제나 닦는 대상이 있는 물듦이 있는 수행이며, 무시선법의 자성 삼학은 내 안에 갖추어진 공원정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물듦이 없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에고[我相]에서 비롯된 탐진치를 떠난 자리[心地]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무시선법의 자성 삼학을 배우고 익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교법의 진수(眞髓)인 일원상의 수행, 즉 자성의 공원정 수행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일생을 마칠 것입니다.
6월 2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