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원상은 눈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 이 원상은 귀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 이 원상은 코를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 이 원상은 입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 이 원상은 몸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 이 원상은 마음을 사용할 때에 쓰는 것이니 원만 구족한 것이며 지공 무사한 것이로다.
일원상 장(章)에서 ‘게송’을 제외하고 맨 끝에 나오는, 가장 쉽고 간결하게 정리된 법어입니다. 위 법어에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원상(○)은 ‘쓰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일원상은 본디 모시고 받드는 대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우러러 받들면서 또한 사용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 원상은 옛적에 태양을 숭배하듯이, 하느님을 우러르듯이 그렇게 숭배하라고 그려놓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각자의 성품으로서, 일상에서 이것을 온전하게 쓰라고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원상을 높은 곳에 올려두고 밖으로 부처님을 대하듯이 하는 것은, 사실 본래의 의미와는 다른 것입니다. 저 일원상은 우리 자신들의 참모습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 원상은 내가 눈을 사용할 때 쓰는 것입니다. 이 원상은 ‘아무 데도 물들지 않은’ 나의 본래 마음이니, 내가 사물을 볼 때는 ‘아무 데도 물들지 않은’ 그 눈으로 보면 됩니다. 그것은 ‘망념이 없고 분별 주착 없는’ 그 마음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되면 ‘원만 구족’하고 ‘지공 무사’한 자성의 특성이 이미 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원상은 또한 귀를 사용할 때 쓰는 것입니다. 이 원상은 ‘아무 데도 물들지 않은’ 나의 본래 마음이니, 내가 소리를 들을 때에도 ‘아무 데도 물들지 않은’ 그 귀로 들으면 됩니다. 이 말은 ‘망념이 없고 분별 주착 없는’ 그 마음으로 듣는다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원만 구족하고 지공 무사한 성품의 작용이 저절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이 원상을 코, 입, 몸, 마음을 사용할 때 쓰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사용할 때는 뭔가 다른 점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마음을 사용할 때도, 즉 생각하고 판단하며 그것을 몸으로 작용시킬 때에도 ‘아무 데도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무시선법에서는 이것을 가리켜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원상(○)은 우리 각자가 지닌 것이며, 지금 당장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쓰는 것인 줄을 모르고 있었다면 그동안 잘못된 공부를 해온 것입니다. 일원상은 우리의 본성입니다. 타자화(他者化)하거나 신성시하는 것이 일원상의 참뜻이 아닙니다.
11월 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