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해를 못 해주시는 거죠? 이렇게라도 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다고 생각해 주실 수는 없나요?’ 커터 칼로 자해한 흉터들이 낭자한 그녀의 손목을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순간 발끈하는 그녀의 반응에 아차 하고 말았다.
내 한숨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힘든 상황이라도 자기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안 된다는 생각의 표현이었을까. 당신 정말 한심하다는 조소였을까. 그것이 무엇이었든지 그녀는 치료자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심리 상담에서 공감은 가장 중요한 치료적 요소이다. 공감만으로 환자를 치료할 수는 없지만, 공감이 없다면 더는 치료받으러 오지 않는다. 치료자는 자신이 사용한 치료 기법 때문에 환자가 호전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환자는 치료자에게 공감받았던 따뜻했던 순간들을 더 오래 기억한다.
전공의 시절, 나의 가장 큰 고민은 공감 능력 부재였다. 괴롭고 고통스럽다면서 펑펑 우는 환자들을 보면 ‘저게 그렇게까지 괴로운 문제일까?’ ‘좀 잊고 살지, 뭘 그렇게 담아두고 살아’ 하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 생각과 감정투성이였다.
선배는 그저 고개나 끄떡이며
내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어쩌다가
‘그랬구나, 그럴 수 있겠다.’ 정도의 대꾸가
다였지만 신기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그 경험은
공감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능력에 대한 회의와 개인적인 고민거리까지 더해져 한 번은 당직 근무를 빼먹고 몰래 병원 밖으로 나가 방황하다가 위 연차 선배에게 들킨 적이 있다. 불호령이 떨어질까 조마조마하던 내게 선배는 ‘너 요즘 왜 그러는지 이야기나 들어보자’라며 나를 숙소로 데리고 갔다. 그렇게 새벽 1시부터 시작된 나의 넋두리는 2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그 시간 동안 선배는 그저 고개나 끄떡이며 내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어쩌다가 ‘그랬구나, 그럴 수 있겠다.’ 정도의 대꾸가 다였지만 신기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이후 나는 믿음직한 지원군을 얻은 마음으로 힘든 시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 경험은 공감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했다.
공감은 ‘어두운 밤길을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것’ 같은 든든함을 준다. 또한 정신치료자의 공감 능력은 ‘동토(凍土)의 땅에 봄을 가져오는 것’과 같아서 얼어붙은 환자의 마음을 녹이는 역할을 한다. 땅이 녹아야 그 위에 씨를 뿌릴 수 있다. 〈원불교교전〉에 나와 있는 수많은 진리의 언어들도 마음이 얼어붙은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문자일 수 있다. 그 말씀들이 자라나 꽃을 피우려면 나의 고민이 경전 속에서 공감받고 있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밝힌 교법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지 않아 공감을 일으킬 만한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 언젠가 한 교도가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리자’라는 이 열세 자가 자기 삶을 바꾸어 놓았다는 감상담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분은 다른 사람 때문에 괴롭고 고통받았던 삶의 시간이 그 열세 자 안에서 녹아내리는 울컥함을 느꼈으며 마치 대종사께서 나의 마음을 헤아리고 함께 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가자며 다독이는 것 같았다고 한다.
간혹 계문대로 살아가지 못하면 한심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때로는 교법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압박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파란고해의 세상, 삶의 질곡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절실함을 갖고 있다면 교전 속 진리의 언어들은 공감으로 살아 움직여 우리를 따뜻하게 맞이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교전의 한 문장 한 문장 속에서 그토록 뜨거운 눈물을 토해내며 오롯이 그 말씀들을 받아들이고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11월 1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