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 무아봉공의 삶을 살고 있는가?
상태바
[동행] 무아봉공의 삶을 살고 있는가?
  • 조경원 편집장
  • 승인 2022.05.26 15:47
  • 호수 126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며칠 전 난민을 돕기 위해 우크라이나 접경 지역을 다녀온 봉공회 교무님을 보며 느낀 감상이다. ‘나는 지금 무아봉공의 삶을 살고 있는가?’

나에게 있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아봉공의 실천행위는 무엇이 있을까. 거룩하고 이상적인 봉공의 개념은 아니더라도 현실에서의 봉사 경험은 무엇이 있을까.

초등학생 때, 매일 아침 아버지와 함께 동네 골목을 쓸었던 추억과 고등학생 때, 매주 노인·장애인 시설에서의 봉사 기억이 비교적 뚜렷하다. 물론 동네 골목을 쓸면 맛있는 우유라는 보상이 있었고, 시설 봉사는 대학 진학 가산점이라는 동기부여가 작용했지만, ‘남을 위해 돕고 있는 나의 행위’와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나에 대한 만족, 그 자체가 좋았다. 그야말로 철모를 때 나를 위한 봉사였다.

출가 이후의 삶에 있어서 무아봉공이라고 한다면 출가의 삶 자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요즘은 개인의 자유와 이익을 교단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고 싶은 일에서 선택적인 봉사를 무아봉공이라 포장하고 착각하며 스스로 위안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조한다. 스물에 출가해 오십 평생을 수화불피(水火不避)의 자세로 공중을 위해 헌신하고 퇴임봉고를 올리는 원로교무의 주름진 얼굴은 저절로 존경의 마음이 나게 하지만, 나도 칠십 넘어 그 자리에 설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매일 새벽 동네 골목을 쓰는 아이의 이마에 맺힌 땀, 그리고 그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아버지. 무아봉공의 의미는 알지 못했지만, 그때의 소박함으로 행(行)에 옮겼던 추억들. 비록 철모르는 봉사였지만 봉사하는 행위와 그 마음으로서 의미를 지니고 그로써 얻는 행복, 또는 깨달음이 있어서 행했던 그때. 그리고 무아봉공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지금. 나는 무아봉공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여기서 그렇게 살고 있는가. 검게 그을린 봉공회 교무의 미소와 굵게 패인 원로교무의 주름은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5월 27일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