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은 원불교 육일대재이다. 이날은 교조이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을 기념하며 모든 일체 생령을 추모하는 공동 향례의 날이다.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예가 드러나며, 마음을 합하여 정성을 바치고, 위의를 이에 갖추어 법계향화(法系香火)가 한없는 세월에 유전되게 하는데 그 뜻이 있다.
원불교 군종장교로 임관하여 맞는 네 번째 육일대재이다. 올해는 부대의 사정으로 5월 31일에 장병들과 저녁 예회를 통해 그 예를 다하였다. 처음으로 군에서 육일대재를 맞는 교도 장병들은 그 뜻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어서 약식으로 진행하였다. 깊은 뜻을 알지 못하더라도 일원상 진리의 큰 뜻을 일러주신 소태산 대종사와 전 생령을 길이 추모한다는 의미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모든 일과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군종장교 후보생 시절에 맞이한 4년 전 육일대재 때와도 같은 물음이었다. 후보생 시절 단 한 명뿐인 원불교 군종장교 후보생을 위해 마련된 빈 사무실에서 올린 육일대재 때와 오늘 모든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떠오른 물음은 다음과 같다. “저, 잘 살고 있는 거죠? 대종사님!”
소태산 대종사의 성안을 본 적 없고, 그 음성을 들어본 적 없지만, 일원상 진리의 깨달음과 가르침으로 출가의 가장 큰 동기가 된 교조이기에 위와 같은 물음을 허공에 던져본다. 그리고 원불교 울타리가 아닌 군이라는 조직과 이웃종교 군종장교와의 공존 속에서 그리고 그 가운데 원불교를 대표하는 삶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기에 위와 같은 물음을 외쳤던 것 같다. 당연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물음은 스스로 반조하고 반성하게 하였다.
부대 창설 이후, 원불교 군교화가 처음 시작된 이곳(제9특전여단)에서의 교화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미궁이었다. 종교시설은 물론 원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깊은 지식을 가진 이들도 없었다. 처음에는 정말 필드에 맨발로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내 임관하면서 표준 삼았던 법문을 떠올렸다. 「~저 풀무 화로가 아니면 능히 좋은 쇠를 이뤄내지 못할 것이요 모든 괴로운 경계의 단련이 아니면 능히 뛰어난 인격을 이루지 못하리니, 너희는 이 뜻을 알아서 항상 안심과 즐거움으로 생활해 가라」 (<대종경> 제13교단품 8장) 경계를 경계로 대하지 않고, 경계를 공부의 도구와 부처님의 인격을 완성해가는 발판으로 삼으라는 말씀이었다. 그렇다. 오로지 내가 가진 것은 인맥도 돈도 명예도 아닌, 소태산 대종사의 교법뿐이었다.
평소 습관대로 생각대로 살기보다, 소태산 대종사께서 일러주신 교법대로 생활하려고 노력했다. 그 생활의 결과는 1년이 지나서 나타난 것 같다. 물론 나의 역량이 부족한지라 더 늦었을 수도 있다. 딱히 입교 장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대면 예회의 횟수보다 비대면 예회의 횟수가 월등히 많았다. 이러한 가운데 교법대로 살아온 삶의 결과를 몇 문장으로 나열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만나는 모든 군 간부들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해주며, 걱정 또는 어려움이 있다면 언제든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어떠한 일이든지 함께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고 협력해준다. 이와 같은 긍정적인 관계 형성이 이루어져 있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원불교는 뭐예요?”가 첫 대화의 시작이었다. 이는 나의 역량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수행적으로 부족한 면이 훨씬 많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의 교법은 어느 곳, 어느 때든지 반드시 환영받게 된다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올해는 “대종사님 저, 잘 살고 있는 거죠?”라는 물음에 “그래. 조금은”이라고 답하실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끊임없는 반조와 반성 속에서 노력하라고 하실 것 같다. 내년에 다시 맞이하게 될 육일대재에 또 같은 물음을 던질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지금보다 더 나은 소태산 대종사의 말씀을 듣기 위해 보은 헌신할 것이다.
6월 1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