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반 농촌 이야기이다.
당시 초등학교에 다닌 세대는 너나없이 누구나 가난을 경험했다. 300원 정도의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학생이 많았다. 선생님께 한 사람씩 앞으로 나아가 수업료를 내는 시간, 유독 가난했던 한 친구는 20원을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흐르는 콧물을 닦고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 친구에게 선생님은 뺨을 때리며 20원을 교실 바닥에 내던졌다. 바닥에 나뒹구는 노란색 10원짜리 동전 두 개를 줍는 사랑하던 친구의 등 뒤로 화살처럼 박히는 폭언, “너 내일부터 학교 나오지 마!”
그 폭력의 현장은 지금까지 각인된 아픔으로 남아 있다. 어쩌면 내게는 영원한 화두인 ‘함께 잘 사는 길, 상생의 씨앗’이 뿌려진 날이기도 했다.
가난은 모두에게 폭력을 낳았고, 배움의 기회조차 빼앗아 버렸다. 어린이의 아픔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그 누구도 없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의 고단한 삶을 알기에 수업료를 달라고 손을 내밀지 못한 시절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친구의 손을 꼭 잡고 보리밭 길을 따라 20여분을 그렇게 걸었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자본주의는 왜 없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그라민은행(세계 최초 서민대출은행)을 설립한 현대 자본주의 금융 산업의 차별적 관행에 저항했던 무함마드 유누스. 그는 세계적 빈곤퇴치 모델(25달러 소액대출로 시작한 서민 무보증·무담보 소액대출 빈곤퇴치 운동)을 만들었다. 이는 원불교를 창립한 소태산 대종사가 저축조합, 방언공사로 실현하고자 한 공동체 정신과 같은 운동이다.
농업 중심의 절대 가난을 넘어 이제 신자유주의는 상대적 빈곤으로 다시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 굳이 폭언이 아니더라도 묵언 속의 폭력을 가하고, 누군가는 빼앗긴 삶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 “내일부터 사회로 나오지 마!”
평화와 평등을 향한 개인의 깨어난 자력의 삶과 공동체를 이끄는 정의로운 헌신 그리고 정의로운 나눔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이다.
9월 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