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인이 경계를 피하여 조용한 곳에서만 마음을 길들이려 하는 것은 마치 물고기를 잡으려는 사람이 물을 피함과 같나니 무슨 효과를 얻으리요, 그러므로, 참다운 도를 닦고자 할진대 오직 천만 경계 가운데에 마음을 길들여야 할 것이니 그래야만 천만 경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큰 힘을 얻으리라. 만일, 경계 없는 곳에서만 마음을 단련한 사람은 경계 중에 나오면 그 마음이 바로 흔들리나니 이는 마치 그늘에서 자란 버섯이 태양을 만나면 바로 시드는 것과 같나니라. 그러므로, 유마경(維摩經)에 이르시기를 “보살은 시끄러운 데 있으나 마음은 온전하고, 외도(外道)는 조용한 곳에 있으나 마음은 번잡하다.”하였나니, 이는 오직 공부가 마음 대중에 달린 것이요, 바깥 경계에 있지 아니함을 이르심이니라.」 <대종경> 수행품 50장
사람이 수도하는 목적은 끝없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한평생 좁은 감옥 속에 갇혀서 사는 수인(囚人)처럼, 중생의 삶이란 매 순간 여섯 경계[六境]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수도인이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는 것은 억만년 묶여 온 사슬을 벗어난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공부하는 법을 모르면 공부를 거꾸로 하는 수가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경우가 현실의 경계를 떠나 고요한 곳에서 독공하려는 것입니다. 위 법문은 바로 그러한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경계를 피해 조용한 데서 공부하려는 것은 물고기를 잡으려는 이가 물을 피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수도인이 공부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여섯 경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눈으로 사물을 보되 그것의 미추(美醜)와 귀천 등에 사로잡히지 않고, 소리 냄새 맛 촉감 뜻 경계를 대하되 그것의 좋고 싫음에 끌려서 속박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수도인이 마음의 자유를 원하는 것은 감옥에 갇힌 사람이 자유를 갈구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갇혀 있지 않고 묶여 있지 않다면 아무도 자유를 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너른 들판에서 따로 자유를 구할 사람이 없듯이, 이 현실의 경계를 모두 떠나서 도를 닦아보겠다고 한다면 처음부터 얼토당토않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탐진치의 파도에 휩쓸려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을 수도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물속에서는 수영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러자면 먼저 헤엄치는 법을 배워서 얕은 곳에서부터 연습해가야 합니다. 수영이 능수능란하기를 바란다면 물을 피해서는 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바른 안목으로 보면, 마음공부라고 하는 그 ‘마음’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마음과 경계는 서로를 의지하고 있어서, 마음이 나면 경계가 있고 마음이 없으면 경계도 또한 없는 것입니다. 깊은 잠에 들면 마음도 없고 경계도 없으며, 잠에서 깨어 마음이 나타나면 경계도 또한 눈앞에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라는 것은 바로 이 ‘마음’의 본래 모습을 확연히 깨달아서 자유롭게 부려 쓰는 것을 말합니다.
“보살은 시끄러운 데 있으나 마음은 온전하고, 외도(外道)는 조용한 곳에 있으나 마음은 번잡하다”고 하였습니다.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이 마음이라는 것, 이것의 실상(實相)을 깨친 사람은 시끄러운 데서도 마음이 고요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사방이 고요한 곳에서도 마음이 요란합니다.
11월 4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