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교화100년을 앞두고 서울교화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산종사를 조명하며 젊은 청년의 기상으로 살아있는 주산종사를 기리며 삶과 일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 주산종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수필하신 법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실천하신 법력’이다…”라고 하신 주산종사 추모사업회 간행사 말씀처럼 “… 문집이 책장에만 꽃혀 있지 않고 모든 원불교인들이 푸른 청년의 기상으로 읽고, 이 세상의 아픔에 동참하는 지남으로 읽었으면 한다. 꼭 그래주길 바란다.”는 간행사 말에 눈길이 꽃혀 독자제위들과 함께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지면을 편집하고자 한다.
이미 나와 있는 책이지만 <한울안신문>의 눈길에 따라 함께 읽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만든 지면이니 색다른 일화를 기대하는 독자들은 혜량해 주시길 바라면서 연재를 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2. 주산종사의 구도역정기
원기 27년에는 다시 영광지부 교감 겸 지부장을 역임하였고 원기 28년 6월 1일 대종사의 열반을 당하여 비통한 가운대 수위단 중앙에 피선되어 친형인 정산종사를 보필하였다.
원기 30년에는 총무부장에 부임하였고,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전재민구호사업회를 발기해 경성·이리·전주·부산 등지에서 일본·만주·중국 등 해외에서 귀환하는 전재동포구호사업을 전개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였으며, 고아원인 『보화원』을 설립, 교단 자선사업의 효시를 이루었다.
교단의 탁월한 지도자였던 주산종사는 전재동포구호사업에 몰두하던 중 이재민의 전염병 발진티푸스에 감염된 줄도 모르고, 학림설립문제·보화원 운영문제·구호사업철수문제·총부서울출장소 설치문제 등 교단의 중대현안을 의논하기 위해 트럭 편으로 총부에 내려오다 건강이 악화되어 원기 31년 3월 27일 40세를 일기로 대종사의 게송을 암송하면서 거연히 열반했다.
작은 키에 위용과 정열에 넘치는 얼굴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를 지닌 주산종사는 교단창업기의 기둥으로서 괄목할 만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원기 31년 4월 그의 유지를 받들어 발족된 금강청년단은 뒷날 원불교청년회의 모체가 되었고, 특히 청년지도와 후진양성에 열과 성을 다했으며, 자신 수행에도 철저했다. 붓글씨와 달마상 그리기에 일가를 이루었고, 진보주의자로서 패기에 넘친 지도자였다.
또한 주산종사는 각 종교의 경서에 통달하는 지혜와 신구 학문을 이해하는 지식에 이르기까지 걸리고 막히는 바가 없었고, 신문·잡지·문학서적을 아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주산종사는 문필에도 능하여 「진경」, 「오! 사은이시여」, 「적멸의 궁전」을 비롯, 많은 시가와 논설을 남겼다.
교단 창립을 위해 신심을 다 바쳐 불태웠던 주산종사는 원기 39년 4월 제2회 수위단회에서 출가위로 추존하고 원기 42년 종사의 법훈을 추서키로 결의하였으며, 원기 76년 3월 제11회 수위단회에서는 소태산 대종사 탄생 100주년 성업봉찬 기념대회를 맞아 법위를 정식 대각여래위로 추존키로 결의했다.
출전:원불교교정원편, 『원불교 법훈록』
5월 2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