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도에 부산상고를 졸업한 후 나이 스무 살에 농협중앙회에 입사하여 40년간 근무하고 정년퇴직하게 되었다. 농협에 입사해서는 주임, 대리, 과장, 차장, 교수, 부사장, 본부장, 부부장, 지점장 등 여러 직함을 달았다가 모두 반납하고 다시 자연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동안 근무했던 사무소를 세어보니 17개나 되었고, 금융점포에서 20년, 농산물유통부서에서 20년간 근무했다. 금융점포에서는 대체적으로 을(乙)의 위치였지만 농산물유통부서에서는 가끔 슈퍼 갑(甲)의 위치에 놓일 때도 있었다. 자신의 위치가 슈퍼 갑이 되었을 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직과 청렴이었다.
1985년 농협 거제군지부 과장으로 근무할 때 관련 업체로부터 돈 봉투를 하나 받게 되어 상사인 지부장님께 보고한 적이 있었다. 지부장님은 직원들과 회식이나 하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말해 주셨다. 자신이 과장이었던 3공화국 시절 어느날 갑자기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연행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조사 결과 관련업체에서 그 과의 서무담당 직원에게 돈봉투를 놓고 갔는데, 그 돈으로 직원들이 회식한 사실이 판명되어 중징계는 면했다고 하셨다. 그 이후 그분은 관련 업체로부터 돈을 받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1993년 농협중앙회에서 김치공장의 운영을 담당할 때였다. 제품 포장용 필름을 공급하는 업체의 임원이 구두 티켓이라면서 상품권 봉투를 슬쩍 놓고 갔다. 나중에 보니 그 봉투 안에는 구두 티켓 대신 10만원권 자기앞 수표가 석 장이나 들어 있었다. 결코 호주머니에 넣을 수 없는 수표 30만원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원불교 수양원에 근무하시는 박세경 교무님을 생각했다. 그래서 그 회사의 사장 명의로 박세경 교무님이 근무하시는 원불교 수양원에 송금을 한 후 그 영수증과 함께 양로원에 기탁한 내용의 메모를 사장님께 송부했다. 내가 원불교 학생회에 다닐 때 ‘나중에 직장에서 뇌물성 물품을 부득이 받아야 한다면 절대로 혼자 취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한다.’고 당부하신 효원 부교무님의 말씀을 실천한 것이었다.
그런데 직위가 올라가서 농산물 유통매장을 위한 농산물 구매본부장이나 하나로마트 점장으로 근무할 때가 있었다. 이 때 나의 위치는 그야말로 슈퍼 갑이 될 수도 있었다. 구매본부장은 과일류와 채소류를 품목별, 시기별, 지역별로 선택해서 구매해야 하고, 점장은 가공식품 등 수많은 상품을 발주해서 매장에서 판매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산지 농협이나 납품업체로부터 온갖 방식으로 납품을 성사시키기 위한 노력이 가해졌다.
업체는 대체로 발주자에게 조심스럽게 처신하다가도 한 번 금품이나 술 접대 등으로 발주자의 마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심지어 자기 직원 다르듯이 만만하게 취급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슈퍼 갑이 도리어 그 업체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었다. 업체나 자신의 조직원들에게 떳떳하고 당당하려면 절대로 약점을 잡히지 않아야 했다.
나는 갑의 위치에 있었지만 더욱 더 자신을 낮추면서 권한을 남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단 한 번도 수사대상이 되거나 내부 감사 등에서 입건되는 일이 없이 무사하게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나는 하위직 때 정직하고 청렴한 상사를 만났고, 원불교에서 스승님들이 내려주신 법문을 나름대로 잘 실행하려고 노력한 결과 자랑스럽게 직장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능력이 출중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을 40년간 품어 준 농협에 감사드리고 정당하고 떳떳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2013.1.2.)
9월 2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