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주산종사 유묵(遺墨)에 나타난 서화세계
1. 머리글
필자는 2002학년도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원불교 서예사에 관한 연구」를 쓸 때 원불교 교사에 나타난 묵적(墨迹)·금석문·현판 등을 다룬 바 있다. 당시 간단하게나마 주산종사의 유작(遺作) 등을 조사하여 수록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하여 더욱 구체화 하고자 한다.
주산종사의 유작(遺作)은 크게 유묵과 달마도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주산종사께서 열반하신지 벌써 60년이 지났고, 여러 가지 이유로 그의 유작들을 찾아내는 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서 출가·재가 교도를 상대로 원불교 인터넷 알림방 등을 통해 광고를 하고 유작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성과가 없어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이런 중에 김대선 교무(문화사회부장)와 송인걸 교무(도봉교당)의 협조로 주산종사 4남인 송경은 교도(서울휘경여고교장, 신림교당 교도회장)가 유묵을 소장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학교와 댁을 방문하여 유묵과 달마도 편지글 등을 다수 수집하게 되었다. 아울러 총부 원불교역사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자료 등을 합하니 총 29점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양현수 교무(은용, 원광대학교 교수)가 주산종사의 생애를 제3기로 구분한 논거와 맞추어 성장기·청년기·장년기 등 제3기로 구분하였다.
제1기는 1907년(1세)부터 1922년(16세)까지로 출가이전의 성장기를 학서기(學書期)에 해당한다. 제2기는 1922년부터 1934년(27세)까지로 출가기 전반을 청년기이며, 제3기는 1934년부터 1946년(40세)까지의 출가기 후반을 장년기로 나누어 밝히고자 한다.
특히 이 시기는 주산종사의 학서 과정에서 가학(家學)의 자료로 추정되는 ‘화옹서간초첩’과 조선후기와 근현대에 호남에서 활동했던 원교 이광사(1705~1777)와 창암 이삼만(1770~1847) 등과 서예에 관한 내용, 그리고 평소 애송하셨다는 동파소식(1036~1101)의 시문과 관련한 서화 내용을 곁들어 종사의 유묵에 나타난 서화 세계를 조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교단 초기에 특히 일제말기와 광복 전후의 치열했던 상황에서 대종사님의 자비경륜을 몸소 실천하시며 밖으로는 교단의 주역으로, 안으로는 수도와 심신수련에 주력하신 주산종사의 유묵 등이 교단과 후진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조대성-
10월 1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