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장기 - 학서기(學書期)
범산 이공전의 「주산종사의 인간상」추모글에서
“주산종사는 당시 우리회상 독보적 서예가였다. 한평생 수많은 서화를 원하는 모든 이에게 고루 써주시었고, 초기 우리교당에는 그 어른의 선서화가 걸리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그 어른은 서화에 천부적 소질을 가지시고 계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성주 고산정 그 어른 고향마을 고로(故老)들에 의하면 그 어른은 아주 어려서부터 땅바닥에 나무토막으로 글씨쓰기를 시작하시었고 무엇이나 보시는 대로 곧잘 그려보기를 즐기시었다 한다. 그런데 글씨와 그림솜씨가 그때부터 놀랄 만큼 대단하셨다 한다.”
라고 하여 어려서부터 서화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계셨음을 지적하고 있다. 구타원 이공주도 「내가 본 주산 선생님」 추모글에서.
“선생은 8세부터 14세까지 조부님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대강 배웠다하며 글씨는 여가로 자습자득을 하였다하는데 그 필법이 정묘하여 숨은 명필이었나니 대종사님께서 친제하옵신 불법연구회의 구교리도, 반야심경, 휴휴암좌선문 외에 액자·주련 등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서 한문은 조부로부터 배웠음을 알 수 있다. 필법에 대해서는 박용덕의 『주산일대기 대장부』에서 보다 자세히 알 수 있다.
“송도군(정산종사)이 전라도에 가고 없는 동안 도열(주산)은 열한 살 때로서 형 대신 집안 일을 거들었다. 이 무렵 도열은 공부 하는데 재미 붙여 틈틈이 글을 읽고 익혔다. 소고삐를 잡고 다니면서 손바닥에 글씨연습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도열은 땅바닥에 곧잘 그림을 그리고 글씨 쓰는 것을 보고 어른들로부터 ‘그놈 참 글씨 잘 쓴다’는 칭찬을 들었고 그럴수록 도열은 운필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도열은 정식으로 서당에 나가 글을 배운 적이 없었다.
집안에서 조부께 배운 것이 고작이었다. 어느 때 조부가 손자의 강을 받고자 하였더니 도열은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할부지예, 외우라하지 말고 그 뜻을 새기라고 하시이소.’ ‘그럼, 뜻을 일러라’ 그러자 도열은 아주 명쾌하게 그 대의를 술술 말하였다. 도열은 문자보다 그 내용을 여실히 파악하고 대의를 새겼다”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산종사는 오직 조부님 밑에서 한학과 서예기초를 익혔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주산종사의 글씨는 원기5년(1920년 12월) 영광으로 이사 올 무렵 가지고 왔다고 전해지는 「회옹서간초첩」(도32)의 서체와 흡사한 것으로 보아 대체로 이것을 자료로 필법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16세의 나이에 이미 한학과 서도에 문리를 터득하였으니 주산의 학서와 필법 연마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10월 20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