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년기(출가전반기)
2) 일원상 족자 - 원기 14년(1929. 24세시 봄)
“사은의 본체를 일원상으로 본 것은 일원상이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로 당시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회당 벽에 송도성이 그린 일원상아래 「사은지본원 여래지불성」 이라 종으로 쓴 족자를 걸었다는 것이다.
… 송도성이 그린 족자 「◯ 사은지본원 여래지불성」은 공식석상에 나타난 최초의 일원상 도형이 된다. … 1935년 대각전을 지을 때까지 불법연구회 총부의 공식집회실인 공회당에 「◯」의 족자를 걸었다는 사실은 교리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작품은 주산의 20대의 최초 작인데 유묵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
모사재인 성사재천(謀事在人成事在天)
3) 최초 교리도 - 원기 17년(1932, 26세) 추정
앞서 살펴본 구타원 이공주의 「내가 본 주산선생님」추모글에서 “대종사님께서 친제하옵신 불법연구회의 구교리도 등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의 내용으로 보아 이 불법연구회의 교리도를 주산의 작품으로 단정할 수 있다. 따라서 2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유일한 서품으로 남아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원기 17년이면 영산지부장으로 부임하여 최초 기관장으로 주로 시문을 많이 남긴 시기인데 이처럼 교리도를 정묘하게 그린 필재와 구성이 뛰어나다.
이 교리도는 원기 17년(1932)에 발간한 『육대요령』에 나타난다. 대종사는 이를 보시고 “참 좋다, 꼭 거북이 같이 생겼다. 오래오래 전해갈 만고의 대법이다. 내 법의 진수가 모두 여기에 들어있다. 이대로만 수행한다면 빈부귀천 유무식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성불 못 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3. 장년기(출가후반기)
글씨를 평가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신운이 담긴 글씨이다.
동국진체의 창시자인 옥동 이서(1662~1723)는 신채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획은 살아야하고 죽어서는 안 된다. 획마다 신기가 머물러 있어야 하며 이 점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획마다 신기가 머무르게 하려면 삼과 절필의 방법을 사용해야 하고 붓의 봉을 속으로 감춰서 써야 한다” 라고 하여 살아있는 글씨를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동국진체의 계승자인 원교 이광사(1705~1777)는, “만약 법에 맞지도 않고 분수를 다하지도 않고서, 오만한 자부심만 가지고 망녕되게 통변을 흉내내며 갑자기 고법을 버린다면, 이것은 의도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므로 결국에는 훌륭한 변화를 이룩할 수도 없을 것이다.
11월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