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라는 것을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참으로 신기하다는 느낌을 받곤한다. 시절 인연이라는 것도 그렇다. 왜 그때 하필 그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까 하는 지금이야 내가 짓고 받는 진리속에서 당연히 인과 연이 과를 만든다는 것을 알지만 가끔씩 그 인과 연이 만들어진 알 수 없는 연유를 생각하다보면 인연복의 소중함이 더욱 새록해진다고나 할까.
나는 어릴 때부터 글을 보고 그 사람이 궁금해진 적이 많은 편이다. 책을 좋아하는 습성인지 월간지나 신문에 기고된 글을 보면서 눈에 띄는 글솜씨를 가진 이들을 시간이 지난 후에 만나면 초면인데도 이미 구면처럼 느껴진다.
지난 해 역삼교당의 다함께 법회에서 <자녀들에게 주는 편지>를 들으면서 언제 시간이 된다면 저 교도를 한번 만나봐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편지글에 담긴 자녀들이 교당에 왔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무겁지 않은 위트와 함께 간절함이 전해졌고 내가 자녀라면 당장 교당으로 달려올 듯해서였다.
이후 역삼교당 교도회장으로, 아프리카어린이돕는 모임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다가 서울 교화 100년 강남지구 간담회에서 훈산 신효영 교도를 만났다.
편지글을 썼던 훈산 신효영 교도는 “ 모태신앙이고 어머니가 연원입니다”라고 운을 뗐다. “어머니가 원불교 교도로서 조석심고를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제가 하는 모든 적공은 어머니가 하시려고 했던 것을 제가 한다는 생각이 들면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신나게 하게 되더라구요”하며 어머니와의 인연을 꺼내는 훈산 신교도의 말이다.
“서울로 이사를 와서 영동교당(이후 압구정 교당, 현재는 대치교당과 통합, 역삼교당)을 다니게 되었어요. 군대 및 직장 생활 중 바쁘던 몇 년을 제외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학진학으로 서울로 오게된 훈산 신교도는 수학을 전공했고 서울 교대 총장을 역임했다.
“은덕 문화원의 아카데미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소광섭 교수의 강의를 듣고는 강의내용을 수학적으로 논증을 해 보겠다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다음 주 강사가 시간을 놓쳐 대타로 강의를 하게 되었고 그 강의는 호평으로 이어져서 원불교에서 이름을 알리게 됐다고 전한다.
물리학적 근거의 교법을 수학적 논증으로 발표한 강의는 예의 편지글에 빗대보면 상상이상으로 엄지척이었을 것.
대학원을 다니면서 임용을 보아 2년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시절에 만난 지금의 아내는 교당을 다니는 도반이 되었고 교당 대소사에 늘 함께했다.
“도심에 자리한 역삼교당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마음을 쉬고 가는 그런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라는 바람은 리모델링 작업에 일조한 승산 감필국 교도와 청산 여청식 교도를 비롯하여 역삼교당 교도들이 만들어 나갈 꿈이다
“실지불공을 표준 삼고 있습니다. 실지불공은 당처에만 하는 불공이 아니라 당처가 마음을 바꿀 때까지 하는 불공이란 것을 알게 돠었습니다”라는 훈산 신교도는 “100년전 대종사님이 내다보신 우리 법이 시대화·대중화·생활화에 앞장서 나간다면 교화가 그리 어렵지만은 아닐 것”이라 강조했다
원불교가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 말에 “나에게 원불교는 어머니입니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세상이 재미없어졌다는 훈산 신교도에게 원불교는 어머니의 종교였으며 그리운 어머니이면서 어머니와 같은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라는 생각에 이르니 세간락에 더 이상 재미없다는 말로 해석된다.
“할머니, 외할머니를 모시던 어머니는 두분 돌아가시고 70세 때 돌아가고 싶다던 원을 이루셨으니 다음 생에 전무출신하고 싶다던 서원도 이루셨을 것이라는 믿음이 듭니다.”
훈산 신교도의 모든 신앙생활은 어머니와 함께 부르는 노래이며 어머니를 그리는 사모곡인 셈이다.
2월 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