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젊은이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문해력)이 나빠져서 한자로 된 ‘심심(甚深)한 사과’, 우리말이지만 ‘사흘’, ‘나흘’처럼 자주 쓰지 않는 낱말의 뜻을 잘 모른다고 한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이 한심하다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 이것은 언어가 시대에 따라 바뀌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1919년 3월 1일에 조선인을 흥분시켰던 기미년 독립선언서(“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前頭의 光明으로 驀進할 따름인뎌”)를 읽으면서 그 당시 사람처럼 이해하고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지금 얼마나 될까?
나는 젊은이들이 우리 경전을 읽다가 마치 기미년 독립선언서를 읽는 것 같다고 느끼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불교 용어를 비롯하여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한자로 된 단어가 많고, 대종경과 법어에는 “∼하니라”로 끝나는 문체가 사용되어 옛말을 적은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몇 달 전에 청년 교도에게서 자기 친구에게 한글 교전을 읽어보라고 했더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며, 오히려 영어 교전이 이해하기 더 쉽다고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나도 사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꽤 있다. 한글 교전의 글은 현대 한국어와 상당히 달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지만, 영어 번역본은 현대 영어를 써서 오히려 이 시대와 더 잘 맞기 때문이다.
『불교정전』을 20년 만에 고쳐 쓴 『정전』과 『대종경』으로 이뤄진 『원불교 교전』이 나온 지 62년이 지났고, 『정산종사 법어』가 처음 발간된 지 52년이 되었다.
오륙십 년 전 시대에 맞던 표현이 지금도 과연 그럴지는 의문이다. 대종사께서는 ‘소수인의 불교를 대중의 불교로’(서품 16) 혁신하자고 하시며 ‘경전도 그 정수를 가려서 일반 대중이 다 배울 수 있도록 쉬운 말로 편찬할 것’(서품 18)이라고 하셨다. 대종사님의 가르침이 이 시대 사람이 읽기에 어렵고 어색하게 씌여서 두루 읽히지 못한다면 우리가 과연 대종사님의 뜻을 실천한다고 할 수 있을까?
성자의 가르침의 내용은 바꿀 수 없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표현은 시대에 맞춰 바꿀 수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68년 전에 나온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에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적었지만, 19년 전에 나온 한국 천주교회 공용 『성경』에서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5장 8절)라고 적었다. 두 글의 내용은 사실 같지만, 현대 한국인이라면 어느 글을 읽을 때 더 공감하겠는가?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시대와 동떨어진 언어에 가둬둘 수는 없다.
대종사님의 가르침이 세대를 어울러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도록 출가와 재가에서 전문가를 모으고, 교도의 의견수렴을 거쳐 투명한 절차를 밟아 수준 높고 읽기 쉬운 현대 한국어로 경전을 고쳐 쓰는 작업을 시작할 것을 감히 제안한다.
3월8일자